저녁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어요
어느 날 저녁에 전화를 받았는데 첫마디가 이상하게 나왔어요. 목이 잠긴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닌데 소리가 안 붙는 느낌이었어요. 두세 마디 하고 나서야 평소 목소리가 나왔어요.
감기인가 싶었는데 아니었어요. 생각해 보니 그날 제가 한마디도 안 했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그 전화를 받기까지 소리를 낸 적이 없었어요. 숙소에서 혼자 일했고, 점심도 혼자 먹었고, 필요한 연락은 전부 글로 했어요.
그날은 좀 놀랐어요. 말을 안 한 것 자체보다 그걸 몰랐다는 게요. 하루가 다 지나고 목소리가 이상해지고 나서야 알아차렸으니까요.
그리고 통화가 끝나고 나서 좀 이상했어요. 20분쯤 이야기했는데 끝나고 나니까 기분이 괜찮았거든요. 특별한 내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냥 소리를 냈다는 것만으로 뭔가 풀린 느낌이었어요.
며칠을 세어봤어요
그래서 며칠 동안 세어봤어요. 하루에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있는지만 표시했어요. 결과는 예상보다 나빴어요.
카페에 가서 주문하는 날은 최소한 몇 마디는 해요. 그런데 그것도 요즘은 화면으로 주문하는 곳이 많아서 말없이 끝나요. 배달은 문 앞에 두고 가고, 장을 봐도 계산은 기계로 해요. 마음먹고 피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입을 안 여는 게 가능하더라고요.
회의가 있는 날은 당연히 달라요. 문제는 회의가 몇 주씩 없는 기간이었어요. 혼자 작업만 하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가 특히 그랬어요. 일이 잘 풀릴수록 오히려 말할 일이 없어지는 구조였어요.
숙소 형태도 영향이 있었어요. 혼자 쓰는 방을 잡으면 하루 종일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아요. 공용 공간이 있는 곳에 있을 때는 최소한 인사라도 하게 되는데요. 저는 조용한 게 좋아서 늘 혼자 쓰는 쪽을 골랐는데, 그 선택이 이 문제를 키우고 있었어요.
주말이 특히 심했어요. 평일에는 그래도 일 때문에 통화가 한 번쯤 생기는데 주말에는 그게 없어요.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한마디도 안 한 적도 있었어요. 세어보기 전에는 그런 주말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말하는 것도 안 하면 둔해져요
그러다 오랜만에 화상 회의가 잡혔어요. 준비도 했고 내용도 다 알고 있었는데 말이 매끄럽게 안 나왔어요.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 있는데 문장으로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중간에 끊기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단어가 안 떠올라서 돌려 말하게 됐어요.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었어요. 그냥 오랜만이라 그랬어요.
그 뒤로 몇 번 더 겪고 나서 확실해졌어요. 말하는 것도 계속 안 하면 감이 떨어져요. 저는 이걸 성격 문제나 그날 컨디션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안 해서 그런 거였어요.
한국말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루 종일 영어로 된 화면만 보다가 오랜만에 한국말로 통화하면 단어가 안 떠오르는 경우가 있어요. 두 언어 다 안 쓰고 있으면 양쪽이 같이 뻑뻑해져요. 저는 이걸 나이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어요.

글로만 하는 소통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혼자 일하면 소통이 거의 글로 이뤄져요. 메일, 메시지, 문서요. 편한 점이 많아요. 기록이 남고, 시차와 상관없고, 보내기 전에 고쳐 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글은 다듬을 시간이 있잖아요. 쓰고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어요. 말은 그게 안 돼요. 생각하면서 동시에 소리로 만들어야 해요. 이 둘은 다른 능력인 것 같아요. 글을 아무리 많이 써도 말하는 쪽은 안 늘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외국어로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차이가 더 커요. 글로는 찾아가며 쓸 수 있지만 말은 그 자리에서 끝나요. 몇 주 말을 안 하다가 회의에 들어가면 확실히 티가 나요. 실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꺼내는 게 뻑뻑해진 상태예요.
그리고 글로만 주고받으면 오해가 쌓여도 모르고 지나가요.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상대가 잠깐 멈추거나 말끝이 흐려지는 게 들리는데 글에는 그게 없거든요. 몇 번은 통화 한 번으로 몇 주 걸릴 일이 정리된 적도 있었어요.
소리 내는 시간을 일부러 만들었어요
그래서 몇 가지를 바꿨어요. 제일 먼저 한 건 주문을 사람에게 하는 거예요. 화면으로 시킬 수 있어도 그냥 카운터에서 말로 해요. 몇 마디 안 되지만 그거라도 하는 날과 안 하는 날은 달라요.
그리고 통화를 늘렸어요. 예전에는 글로 보내면 될 걸 왜 전화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생각해요. 짧게 통화로 끝낼 수 있는 건 통화로 해요. 일 처리도 빠르고 저에게도 필요한 시간이니까요.
정기적으로 통화하는 사람도 몇 명 정해뒀어요. 일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요. 특별한 용건이 없어도 안부만 나누는 통화예요. 처음에는 용건 없이 전화하는 게 어색했는데 몇 번 하니까 괜찮아졌어요. 상대도 반가워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회의 전에 준비하는 방식도 바꿨어요. 예전에는 할 말을 적어두기만 했는데 지금은 소리 내어 한 번 말해봐요. 적은 걸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실제로 발음해 보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회의에서 첫마디가 훨씬 부드럽게 나와요.
혼잣말이 이상한 게 아니었어요
하나 더 있어요. 저는 일하면서 혼잣말을 좀 해요. 예전에는 이게 이상한가 싶었어요. 혼자 오래 지낸 사람의 습관 같아서 남 앞에서는 안 하려고 했고요.
그런데 이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생각을 소리로 꺼내면 정리가 돼요. 머릿속에서만 굴릴 때는 뭉쳐 있던 게 말로 만들면 순서가 생겨요. 막힌 문제를 소리 내어 설명해 보면 어디서 막혔는지 스스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일부러 해요. 복잡한 걸 정리할 때 앉아서 혼자 설명해 봐요. 듣는 사람이 없어도요. 이게 글로 적는 것과 또 달라요. 적으면 정돈된 문장만 남는데, 말로 하면 정리되지 않은 부분까지 그대로 드러나거든요.
다만 장소는 가려요. 공용 공간이나 카페에서는 안 해요. 몇 번 무심코 소리를 내고 옆자리에서 쳐다본 적이 있어서요. 지금은 방에 혼자 있을 때만 하고, 밖에서는 그냥 종이에 적어요.
말하는 것도 유지해야 하는 기능이에요
이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하나 바뀌었어요. 저는 말하기를 사람을 만나는 일의 부속처럼 여겼어요. 사람을 만나면 말을 하는 거고 안 만나면 안 하는 거라고요.
그런데 말하는 것 자체가 계속 써야 유지되는 기능에 가깝더라고요. 몸을 안 쓰면 굳는 것처럼요. 이건 외로움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예요. 저는 혼자 있는 게 크게 힘들지 않은 편인데도 이 문제는 따로 생겼거든요. 마음이 괜찮은 것과 기능이 유지되는 건 별개였어요.
혹시 혼자 일하고 계시다면 하루에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있는지 며칠만 세어보시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적을 수 있어요. 다만 목이 잠기거나 목소리가 오래 안 돌아온다면 그건 다른 이유일 수 있으니 병원에서 확인해 보시는 게 맞고요. 저는 세어보고 나서 통화 몇 개를 일정에 넣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회의에서 말이 훨씬 잘 나왔어요.
돌아보면 저는 몸 관리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신경 쓰면서 이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걸은 거리를 세고 잔 시간을 보면서 말한 시간은 세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것도 매일 쓰는 거고 안 쓰면 티가 나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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