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에 체온계를 봤어요. 눈금이 39도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방에는 저 혼자였고, 다음 날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냥 버티면 될 줄 알았다
열이 오르기 시작한 건 저녁부터였어요.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누워서 자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에 있었으면 엄마한테 전화하거나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 왔을 텐데, 여기선 그럴 사람이 없었어요. 몇 시간을 그렇게 뒤척이며 아침이 오기만 기다렸어요.
밤이 깊어질수록 열은 더 올랐어요. 몸이 떨리고 이불을 몇 겹을 덮어도 추웠어요. 창문을 다 닫고 히터까지 켰는데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혼자 있다는 게 평소엔 아무렇지 않다가, 아플 때만 갑자기 크게 느껴지는 거였어요.
물을 가지러 부엌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어요.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인데 그게 그렇게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어요.
누구한테 연락을 할까 고민했어요. 한국은 낮이었지만 가족한테 걱정만 끼칠 것 같아서 메시지도 안 보냈어요.
결국 그날 밤은 그냥 혼자 버텼어요. 해열제도 없었고, 있는 건 물 한 병뿐이었어요.
아침이 되자 열이 조금 내렸어요. 그제야 지난밤 제가 얼마나 아무 준비도 없었는지가 보였어요.
그 와중에 여행자보험에 가입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어요. 급하면 병원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조차 몰랐어요.
이 나라 응급실 전화번호도 몰랐어요. 검색을 해보려 했는데 손이 떨려서 휴대폰 화면조차 잘 안 보였어요.
한국이었다면 늦은 밤에도 문 여는 병원을 찾거나 가족한테 데려다 달라고 했을 텐데, 그 선택지 자체가 없었어요.
결국 할 수 있는 건 몸을 웅크리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어요. 그 몇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어요.
약국을 몰라서 헤맸다
낮이 되고 나서야 약국을 찾아 나섰어요. 그런데 익숙한 브랜드 이름이 하나도 안 보였어요.
한국에서 먹던 해열제 이름을 말했는데 약사가 못 알아들었어요. 성분명을 몰랐으니 설명할 방법도 없었어요.
결국 약사가 추천해준 걸 그냥 받아왔어요. 포장지 설명을 번역기로 돌려가며 용량을 확인했어요.
그 과정이 열이 있는 상태로는 유난히 더 힘들었어요. 평소라면 몇 분이면 끝날 일이 30분 넘게 걸렸어요.
계산할 때도 현지 화폐 단위가 낯설어서 지폐를 몇 번이나 다시 세어봐야 했어요. 몸도 힘든데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하니 더 지쳤어요.
그리고 약값도 예상보다 비쌌어요. 보험 적용이 안 되는 나라라 몇 가지만 샀는데도 꽤 나왔어요. 영수증을 챙겨두긴 했지만 나중에 보험 청구가 될지도 그때는 확신이 없었어요.
그날 사 온 약이 맞는 약인지도 확신이 안 섰어요. 그냥 열이 내리기를 바라면서 먹었어요.
다행히 하루 지나니 나아졌어요. 그런데 그 하루 동안 겪은 막막함이 오래 남았어요.
증상을 영어로 설명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어요. "열이 난다"까지는 되는데 "몸살 기운이 있다"는 표현이 안 떠올라서 손짓만 했어요.
약사가 몇 가지를 물어봤는데 절반은 못 알아듣고 대충 고개만 끄덕였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위험할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어요.
그날 이후로 기본적인 증상 표현 몇 가지는 따로 적어서 외워뒀어요. 열, 오한, 두통, 몸살 정도는 바로 말할 수 있게요.

약을 사 오는 길에 죽 같은 걸 사 갈까 하다가 그럴 기운도 없어서 그냥 물만 사 왔어요. 냉장고에는 며칠 전 사둔 재료뿐이라 그걸로 뭘 만들 엄두도 안 났어요.
그날 저녁에야 겨우 죽집을 검색해서 배달을 시켰어요. 앱으로 주문하는 것도 아픈 상태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힘들게 느껴졌어요.
주소를 입력하는 것도 헤맸어요. 숙소가 며칠 전에 옮긴 곳이라 정확한 위치 설명이 아직 손에 익지 않았거든요. 배달원과 몇 번 문자를 주고받고 나서야 겨우 받았어요.
그날 일도 손을 놨어요. 마감이 있었는데 도저히 앉아 있을 상태가 아니었어요. 클라이언트에게 몸이 안 좋아서 하루만 늦추겠다고 메일을 보냈어요.
다행히 이해해줬지만, 그 메일을 쓰는 손끝까지 힘이 없었어요. 혼자 일하면 아픈 것도 스스로 알려야 한다는 걸 그때 새삼 느꼈어요. 아무도 제 상태를 대신 전해주지 않으니까요.
전자체온계 배터리가 그때 다 돼 있었던 것도 나중에 알았어요. 몸으로 느끼는 열감만으로 상태를 짐작해야 했는데, 정확한 숫자가 없으니 더 불안했어요.
상비약부터 다시 채웠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게 상비약을 갖추는 거였어요.
해열제, 소화제, 감기약을 한국에서 올 때 챙겨오거나 현지 약국에서 성분명을 확인해서 미리 사둬요.
그리고 성분명을 적은 메모를 휴대폰에 저장해놨어요. 아플 때는 생각이 잘 안 나니까 미리 적어두는 게 나았어요.
체온계도 새로 샀어요. 예전 건 어느 숙소에 두고 왔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지금은 짐 쌀 때 제일 먼저 챙기는 물건 중 하나예요.
새 도시에 도착하면 며칠 안에 가까운 24시간 약국과 병원 위치부터 확인해요. 아플 때 찾으면 늦으니까 미리 봐두는 거예요.
그리고 몇 안 되는 현지 친구에게 아플 때 연락해도 되는지 미리 물어봤어요. 다행히 다들 흔쾌히 그러라고 했어요. 그 한마디를 미리 들어둔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어요.
전자체온계 배터리도 여분으로 챙겨뒀어요. 정작 필요할 때 방전돼 있었던 그날의 기억 때문이에요.
배달 앱에 자주 시키는 죽집을 즐겨찾기 해뒀어요. 아플 때 검색부터 하는 것도 일이라는 걸 그날 알았거든요.
그리고 화상 진료가 되는 앱도 하나 깔아뒀어요. 아직 써본 적은 없지만,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한국 가족한테는 아팠던 걸 나중에 얘기해요. 그날그날 알리면 걱정만 하니까요. 대신 상비약과 연락처를 미리 갖추는 걸로 그 걱정을 대신하려고 해요.
여행자보험도 매번 확인해요. 예전에는 서류만 받아놓고 실제 병원 연계 번호나 청구 방법은 안 읽어봤어요. 지금은 도착 첫 주에 그 문서를 한 번 읽어요.
증상을 말하는 문장 몇 개도 메모장에 저장해뒀어요. 열이 있다, 몸살 기운이 있다, 목이 아프다 정도는 언제든 바로 꺼내 쓸 수 있게요.
근처에 문 여는 약국이나 병원 운영 시간도 미리 확인해요. 밤늦게 급할 때 검색하는 것과 미리 알아두는 건 마음가짐부터가 달라요.
클라이언트에게 아프다고 알리는 문구도 미리 만들어뒀어요. 급하게 쓰면 말이 이상해지니까, 담담하게 상황만 전달하는 문장으로 정해뒀어요.
숙소를 구할 때도 그날 이후로 기준이 하나 늘었어요. 가까운 거리에 약국과 편의점이 있는지를 꼭 확인해요. 예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부분이었어요.
지금도 혼자 아픈 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얼마 전에도 감기 몸살로 며칠을 앓았어요. 다만 그때는 상비약을 바로 꺼내 먹고, 죽집에 익숙하게 주문하고, 클라이언트에게 미리 만들어둔 문장으로 상황을 알렸어요. 몸이 힘든 건 똑같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은 없었어요. 그날 밤의 무서움은 아픈 것 자체보다 아무 준비가 없었다는 것에서 온 거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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