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델리를 건너뛴 날
몇 년 전, 미국에서 유럽을 거쳐 한국에 갔던 여행이 있었어요. 원래 계획은 한국을 다녀온 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도 뉴델리에 잠깐 들르는 거였어요. 거기 형님이 계셔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그동안 못 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어요. 항공권도 그렇게 끊어놨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있는 동안 마음이 바뀌었어요. 뉴델리를 건너뛰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곧장 돌아가는 표로 바꿔버렸어요. 일부러 항공권을 재발권까지 하면서요. 그때는 그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경유 한 번 빼는 정도니까요. 오히려 일정이 단순해져서 잘한 선택이라고 여겼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결정이 그 여행에서 제가 내린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었어요. 그렇게 쉽게 바꿀 일이 아니었는데, 저는 너무 가볍게 표를 바꿨어요.

하루가 그렇게 커 보였어요
표를 바꾼 가장 큰 이유는 친구였어요. 한국에서 친구와 하루를 더 보내고 싶었거든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가 한창이었고, 하루만 더 있으면 못다 한 시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하루가 그때는 그렇게 커 보였어요. 반면 뉴델리는 어차피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형님은 거기 계속 계실 거고, 다음에 또 지나는 길에 들르면 된다고요. 그 순간의 저에게는 눈앞의 하루가 훨씬 선명했고, 형님과의 만남은 언제든 미룰 수 있는 흐릿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선명한 쪽을 골랐어요. 친구를 만난 게 잘못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친구와 보낸 그 하루도 좋았어요. 다만 저울에 올려놓고 보면 기울지 말았어야 할 쪽으로 기운 거였어요. 그때는 그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형님과 나누지 못한 이야기
문제는 그 다음이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여행 이후로 몇 년이 지났는데, 저는 아직도 형님과 그때 나누려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어요. 서로 사는 곳이 다르고, 시차가 있고, 각자 삶이 바쁘다 보니 마주 앉아 이야기할 시간이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아요. 전화로 짧게 안부를 묻는 것과 얼굴을 보고 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완전히 달라요. 그때 뉴델리에 들렀으면 며칠이라도 같이 지내면서 그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마침 그 길이 형님이 계신 곳을 지나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기회가 그때 딱 한 번 있었고, 저는 그걸 하루와 바꿔버린 거예요. 친구와 보낸 그 하루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기억도 흐릿한데, 형님과 나누지 못한 그 이야기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 하루가 즐거웠다는 기억보다, 그때 뉴델리를 그냥 지나쳤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훨씬 오래 남았어요. 형님과는 어릴 때 이야기부터 요즘 사는 이야기까지 나눌 게 참 많았어요. 그런 이야기는 며칠을 붙어 있어야 나오는 거지, 짧은 통화로는 겉만 훑고 끝나요. 뉴델리에서의 그 며칠이 그런 자리가 됐을 텐데, 그걸 제 손으로 지운 거예요.
왜 가족은 늘 뒤로 밀릴까
이 일을 오래 곱씹으면서 저는 제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자꾸 생각하게 됐어요. 저에게 친구와의 하루는 지금 아니면 사라질 것 같았고, 형님은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언제든이라는 게 저의 착각이었어요. 형님이 인도에 계속 계실 거고 그래서 다음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저 혼자 마음대로 정해놓고 있었던 거예요. 돌이켜보면 저는 늘 그런 식이었던 것 같아요. 눈앞의 약속은 급하게 여기면서, 정작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은 자꾸 뒤로 미뤘어요. 늘 곁에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믿음에는 사실 아무 근거가 없었어요. 형님과 마주 앉을 수 있는 그 기회가 그렇게 드물게 오는 거였는데, 저는 그걸 흔한 걸로 여기고 가장 나중으로 미뤄버렸어요. 무엇이 급하고 무엇이 나중이어도 되는지, 저는 그 순서를 거꾸로 매기고 있었어요.

후회를 어떻게 두고 있나
이 후회가 지금은 정리됐느냐고 하면, 솔직히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고들 하는데, 이건 무뎌지기보다 가끔씩 다시 또렷해져요. 형님 생각이 날 때, 혹은 그때 그 친구를 다시 만날 때 문득 떠올라요. 저는 이걸 억지로 좋게 포장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도 친구와 좋은 시간을 보냈으니까라거나 다 지난 일인데라고 저를 달래봐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더라고요. 후회를 서둘러 덮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불편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 후회를 그냥 남겨두기로 했어요. 잊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어떤 선택이 저에게 무엇을 남기는지를 알려주는 표시로 두는 거예요. 후회를 지우는 것보다, 그 후회가 가리키는 방향을 기억하는 게 저에게는 더 쓸모 있었어요. 적어도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넘어지지는 않게 해주니까요.
그다음부터 달라진 것
그 뒤로 달라진 게 하나 있어요. 저는 웬만하면 처음 세운 계획을 잘 바꾸지 않아요. 여행이든 뭐든 중간에 마음이 흔들려도, 처음에 그렇게 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고 스스로 되뇌어요. 사실 처음 계획에는 형님을 만나는 일정이 들어 있었어요. 그걸 나중에 더 나은 선택이라며 바꾼 게 저였고요. 지나고 보니 그건 더 나은 선택이 아니라 그저 더 편하고 더 즐거운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계획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계획은 바뀔 수도 있어요. 다만 무언가를 바꿀 때, 제가 지금 무엇을 뒤로 미루고 있는지는 한 번쯤 들여다봐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그때 제가 미룬 건 경유지 하나가 아니라 형님과 마주 앉을 시간이었으니까요. 그걸 그때 알았다면 저는 아마 표를 바꾸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음에 그런 갈림길이 오면 이번엔 다르게 서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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