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를 적는 칸에서 멈칫해요
어떤 서류나 화면을 채우다 보면 늘 잠깐 멈칫하는 칸이 있어요. 주소를 적는 칸이에요. 대부분의 양식은 사람에게 고정된 집 하나가 있다고 전제하고 만들어져 있어요. 그런데 저는 몇 주, 길어야 몇 달 단위로 지내는 곳을 옮겨요. 그러니 여기에 뭘 적어야 하나 매번 고민이 돼요. 지금 묵고 있는 숙소 주소를 적자니 곧 떠날 곳이고, 그렇다고 딱히 내 집이라고 할 만한 곳도 없어요.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그 칸이 저에게는 늘 애매한 질문이에요. 처음에는 이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순간이 쌓이다 보니 알게 됐어요. 세상은 사람이 한곳에 산다는 걸 기본값으로 두고 돌아간다는 걸요. 그 기본값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사소한 데서 자꾸 걸리는 게 생겨요. 주소라는 게 그저 위치를 적는 칸이 아니라,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표시라는 걸 그제야 느꼈어요.

택배를 받을 곳이 없어요
가장 자주 부딪히는 건 택배예요. 뭘 하나 주문하려고 해도 받을 주소를 넣는 데서 막혀요. 지금 숙소로 시키면 되지 않느냐 싶지만, 그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아요. 배송이 며칠 걸리는 사이에 제가 그 숙소를 떠나버리면, 물건은 제가 없는 곳으로 가버려요. 실제로 그런 적이 있어요. 필요한 걸 주문해놓고 도착 날짜를 확인 안 했는데, 물건이 오기 하루 전에 다음 도시로 이동한 거예요. 결국 그 숙소 주인에게 부탁해서 받아뒀다가 한참 뒤에 어렵게 돌려받았어요. 그마저도 다음에 그 도시를 다시 지날 일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아니었으면 그냥 잃어버릴 뻔했어요. 얼굴도 모르는 다음 투숙객 방에 제 물건이 놓여 있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묘했어요. 그 뒤로는 뭘 주문하기 전에 배송 예정일부터 확인하는 게 버릇이 됐어요. 언제 도착하는지, 그때 내가 아직 여기 있는지를 먼저 따져요. 남들은 그냥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하면 되는 일을, 저는 일정표를 옆에 놓고 계산부터 해요. 이 하나만 봐도 고정된 집이 있다는 게 실은 얼마나 많은 걸 조용히 해결해주고 있었는지 알겠더라고요.

남의 주소를 빌려요
그래서 저는 고정된 주소가 하나 필요할 때 가족의 주소를 빌려요. 온라인으로 가입하는 것들, 오래 두고 받아야 하는 우편물은 다 그리로 가게 해뒀어요. 덕분에 급할 때 물건을 그쪽으로 시켜두면 가족이 받아줘요. 고마운 일인데, 동시에 좀 미안하기도 해요. 제 짐이 남의 집에 쌓이는 거니까요. 가끔 가족이 무슨 우편물이 왔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면, 그걸 보고 열어봐 달라거나 그냥 버려도 된다고 답해요. 제 이름으로 온 편지를 제가 직접 못 보고 누군가를 거쳐서 확인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제 공식 주소는 여전히 부모님 댁인 셈이니까요. 편하긴 한데, 이게 언제까지 기댈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언젠가는 저도 제 이름으로 된 주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문득문득 들거든요.
급한 건 그 도시에서 사요
택배가 이렇게 번거로우니, 저는 웬만한 건 그냥 그 도시에서 사요. 필요한 게 생기면 미리 주문해서 받는 대신, 도착한 다음에 근처 가게에서 구해요. 물론 원하는 걸 정확히 못 구할 때도 많아요. 익숙한 브랜드가 없거나, 값이 더 비싸거나요. 그래도 확실히 손에 들어오는 게 낫더라고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택배를 기다리느니, 좀 아쉬워도 그 자리에서 사는 게 마음이 편해요. 그러다 보니 미리 쟁여두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사라졌어요. 어차피 다음 도시에서 또 구할 수 있는 거라면 굳이 지금 여러 개 사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필요할 때 그때그때 현지에서 해결하는 식이에요. 받을 곳이 없어서 생긴 불편이, 엉뚱하게도 물건을 덜 사게 만들어준 셈이에요. 어디든 가면 살 데는 있으니,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는 데도 익숙해졌고요.
공식 우편은 제일 골치예요
제일 골치 아픈 건 공식적인 우편이에요.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오는 서류들은 아무 데로나 받을 수가 없어요. 중요한 내용이 종이로만 오기도 하고, 정해진 주소로만 보내주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이런 건 가족 주소로 받아두고, 급한 건 사진으로 찍어 보내달라고 해서 확인해요. 그래도 직접 손에 쥐고 처리해야 하는 게 있으면 곤란해져요. 서명을 해서 다시 부쳐야 하는 서류 같은 건 특히 그래요. 제가 지금 지구 반대편에 있는데 종이 한 장 때문에 일이 막히는 거예요. 요즘은 웬만한 게 온라인으로 되어서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종이와 주소를 고집하는 곳은 아직 남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제가 세상의 기본 양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실감해요. 편리하게 돌아가는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은 한자리에 머무는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어디 사세요, 라는 질문
누가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저는 아직도 뭐라고 답할지 잠깐 고민해요. 한 단어로 딱 떨어지는 답이 없거든요. 지금 있는 도시를 말하자니 곧 떠날 거고, 원래 어디 출신이라고 말하자니 거기 안 산 지 오래됐어요.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거나, 이야기가 길어지는 걸 각오하고 사정을 설명해요. 주소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여러 군데서 저를 멈칫하게 해요. 서류의 빈칸에서, 택배 주문 화면에서, 그리고 이런 가벼운 질문 앞에서요. 불편하냐고 하면 불편한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그렇다고 이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라고 멋있게 포장하고 싶지도 않아요. 좋은 것도 불편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 제 삶의 모양이 이런 거예요. 어디에도 딱 붙어 있지 않은 상태요. 다만 언젠가 다시 어딘가에 제 주소를 두게 된다면, 그때는 그 빈칸을 채우는 게 조금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남들에겐 그저 당연한 그 한 줄이, 저에게는 한동안 없던 것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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