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몇 벌 안 돼요
저는 옷이 몇 벌 없어요. 가진 걸 다 들고 다녀야 하니 옷장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상의 몇 개, 하의 두어 개, 그걸 돌려가며 입어요. 처음 이렇게 다니기 시작할 때는 옷이 부족하면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사실 집에 옷장 가득 옷이 있어도 손이 가는 건 늘 몇 벌뿐이잖아요. 저는 그 몇 벌만 들고 다니는 셈이에요. 덕분에 아침에 뭘 입을지 고민할 일도 없어요. 어차피 선택지가 몇 개 안 되니까요. 그런데 옷이 적다는 건 편한 만큼 대가도 있어요. 같은 옷을 자주 입으니 그만큼 자주 빨아야 한다는 거예요. 옷이 많으면 며칠은 안 빨고 버틸 수 있는데, 저는 그럴 여유가 없어요. 입을 게 몇 벌 안 되니 조금만 미뤄도 바로 입을 옷이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빨래를 자주 해요
그래서 저는 빨래를 자주 해요. 남들이 상상하는 노마드의 하루에는 아마 빨래 같은 건 없을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빨래가 제 일상에서 꽤 큰 자리를 차지해요. 옷이 몇 벌뿐이니 며칠만 지나면 입을 게 떨어져요. 그러면 또 빨아야 하고요. 숙소에 세탁기가 있으면 다행이에요. 없으면 근처 빨래방을 찾아가거나, 급하면 세면대에서 손빨래를 해요. 빨래방을 찾는 것도 일이에요. 낯선 동네에서 빨래방이 어디 있는지, 동전을 쓰는지 카드를 쓰는지, 세제는 파는지를 매번 알아봐야 해요. 기계마다 쓰는 법도 조금씩 달라서 처음 가는 곳에서는 한참을 들여다봐요. 익숙해질 만하면 또 다른 동네라, 빨래방 하나 찾는 것도 옮기는 곳마다 매번 새 숙제예요. 여행이 화려한 거라고들 하지만, 제 여행의 상당 부분은 이렇게 옷을 빨고 말리는 소소한 일로 채워져 있어요. 그래도 손빨래에도 나름의 요령이 붙어서, 이제는 세면대에서 티셔츠 한 장쯤은 금방 빨아 짜요. 처음엔 물만 잔뜩 튀기고 제대로 짜지도 못했는데, 하다 보니 손목 힘 쓰는 법까지 알게 됐어요.
말리는 게 제일 골치예요
빨래에서 정작 힘든 건 빠는 게 아니라 말리는 거예요. 건조기가 있는 숙소는 드물어요. 그러니 빤 옷을 방 안에 널어서 말려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까다로워요. 습한 나라에서는 하루가 지나도 옷이 눅눅해요. 방에 빨래를 잔뜩 널어놓으면 그 습기 때문에 방까지 꿉꿉해지고요. 널 데가 마땅치 않은 방도 많아요. 의자 등받이, 문고리, 창틀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널어요. 그렇게 방 안 여기저기에 옷이 걸려 있으면 저녁의 숙소가 좀 궁상맞아 보이기도 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다음 날 입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빨래를 되도록 아침 일찍 해요. 해가 있을 때 최대한 말려야 저녁에 덜 눅눅하거든요. 창가에 옷을 널고 하루 종일 창문을 열어두는 게 제 나름의 요령이에요. 그런 사소한 요령 몇 개로 어떻게든 다음 날 입을 옷을 말려내요.

이동하는 날엔 빨래를 안 해요
그러다 보니 빨래에도 나름의 규칙이 생겼어요.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전날에는 빨래를 안 해요. 안 마른 옷을 가방에 넣어야 하는 상황을 피하려고요. 한번은 이걸 계산 안 하고 떠나기 전날 밤에 빨래를 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어요. 아침에 덜 마른 옷을 어쩔 수 없이 비닐봉지에 넣어 가방에 넣었는데, 다음 숙소에 도착해서 열어보니 쿰쿰한 냄새가 배어 있었어요. 결국 그 옷을 도착하자마자 다시 빨아야 했어요. 젖은 옷 때문에 가방 안의 다른 짐까지 눅눅해져서 더 곤란했고요. 그 뒤로는 이동 이틀 전에는 빨래를 다 끝내두려고 해요. 넉넉히 말릴 시간을 두는 거예요. 남들 눈에는 이게 뭐 대단한 계획인가 싶겠지만, 저에게는 이런 사소한 일정 관리가 이동 생활을 굴러가게 하는 톱니바퀴 같은 거예요. 옷 한 벌 잘못 말려서 며칠을 냄새나는 옷으로 다닐 순 없으니까요.
옷이 닳는 게 눈에 보여요
옷이 적으니 또 하나 생기는 일이 있어요. 옷이 눈에 띄게 빨리 닳아요. 같은 옷을 계속 입고 계속 빠니 당연한 일이에요. 목이 늘어나고, 색이 바래고, 어느새 구멍이 나요. 집에 옷이 많을 때는 한 벌을 몇 년씩 입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끼는 옷일수록 더 빨리 해져요. 그만큼 자주 입으니까요. 그래서 옷이 하나 망가지면 그 도시에서 새로 사요. 나라마다 파는 옷이 다르니, 제 옷장은 그동안 지나온 나라들이 조금씩 섞여 있어요. 이 티셔츠는 어디서 샀고 저건 어디서 샀는지 대충 기억나요. 재미있는 건 사진을 찍어보면 어느 시기든 제가 늘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는 거예요. 옷이 몇 벌뿐이니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제 여행 사진들은 배경만 바뀌고 저는 늘 같은 차림이에요. 나중에 사진을 넘겨 보면 옷으로는 언제 어디였는지 구분이 잘 안 가더라고요. 처음에는 그게 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남들은 사진마다 다른 옷을 입고 있는데 저만 늘 같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별로 신경 안 써요. 무엇보다 그 몇 벌이 저에게는 손에 익어서 제일 편하거든요. 새 옷을 잔뜩 늘려서 고민하느니, 편한 몇 벌을 계속 입는 게 저에게는 더 잘 맞아요.
볕에 마른 티셔츠 냄새
빨래는 제가 하는 일 중에 제일 안 멋진 축에 들어요. 여행 사진에 남을 일도 없고, 누구에게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막상 잘 마른 옷을 걷어서 개어놓고 나면 기분이 묘하게 개운해요. 볕에 바싹 마른 티셔츠에서 나는 냄새를 저는 참 좋아해요. 며칠 입을 옷이 깨끗하게 준비돼 있으면, 그 사소한 데서 오는 안심이 있어요. 옷이 몇 벌뿐이라 늘 아슬아슬한데, 빨래를 막 끝낸 그 하루만큼은 그 걱정이 없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 옷을 손으로 빨고 물을 짜고 하나하나 널다 보면, 그 몇십 분 동안은 머리가 조용해져요. 다른 일은 다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데, 이건 몸을 써서 눈앞에서 끝나는 일이라 그런가 봐요. 낯선 곳을 떠도는 생활이 가끔 붕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렇게 옷을 빨고 너는 그 순간만은 손끝에 뭔가 잡히는 기분이에요. 별것 아닌 빨래 한 번에 그런 감각을 얻는다면, 저는 이 안 멋진 일을 앞으로도 군말 없이 계속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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