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에 뜬 빨간 날짜를 보고서야 이번 주가 추석이라는 걸 알았어요. 다른 나라에 있으면 명절은 그냥 평범한 화요일이었어요.
달력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모르고 지나갔다
숙소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어요. 휴대폰 알림으로 가족 단체 채팅방이 갑자기 시끄러워졌어요.
사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큰집에 모인 가족들, 상 위에 올라간 전과 나물, 조카들이 세배하는 모습까지요.
그제야 오늘이 추석이라는 걸 알았어요. 몇 년째 겪는 일인데도 매번 이렇게 뒤늦게 알아차려요.
이 나라 달력에는 당연히 그런 표시가 없어요. 마트도 평소처럼 문을 열었고, 거리도 다를 게 없었어요.
계산대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다들 평범한 화요일을 보내는 얼굴이었어요. 저 혼자만 다른 시간대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잠깐 스쳤어요.
그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어요. 한국에서는 몇 주 전부터 기차표 예매 이야기가 나오는 시기인데, 여기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어요. 예전엔 저도 그 예매 전쟁에 끼어 새벽부터 사이트를 새로고침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소란과 아예 무관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게 묘했어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괜히 걸음이 느려졌어요.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만 붕 뜬 채로 거리를 걸었어요.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칠 골목 풍경도 그날따라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졌어요. 다들 어디선가 명절을 보내고 있을 텐데 저만 그 흐름 밖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숙소 앞 계단에 잠깐 앉아 하늘을 봤어요. 여기 하늘은 그냥 평소와 똑같았어요. 그게 왠지 더 서운했어요.
이맘때쯤 한국은 보름달이 뜬다고 들었는데, 여기서는 달을 봐도 딱히 특별한 느낌이 안 들었어요.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계절감마저 다르게 느껴졌어요.

방으로 들어와 짐을 정리하는 척하며 시간을 좀 흘려보냈어요. 딱히 할 일이 없는데도 뭔가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날은 미리 알고 넘어갔어요. 한국 뉴스를 챙겨 보던 시절엔 명절 연휴 소식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뉴스조차 잘 안 보게 되면서 명절이 오는 것도 그때그때 놓치게 됐어요.
캘린더 앱에 한국 공휴일을 표시해두는 기능이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어요. 몇 년째 이 문제를 겪으면서도 정작 해결할 방법을 찾아볼 생각은 안 하고 있었던 거예요. 숙소로 돌아가면 바로 설정해둬야겠다고 그 자리에서 메모까지 남겼어요.
사진 속 얼굴들을 한참 들여다봤다
채팅방 사진을 몇 번이고 다시 열어봤어요. 작은어머니가 만든 전 접시, 사촌 동생의 새 옷, 할머니 옆에 앉은 막내 조카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았어요.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사진인데 그날은 유난히 오래 들여다보게 됐어요. 마치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것처럼 배경까지 자세히 살폈어요.
할머니가 부쩍 늙으셨다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매번 화면으로만 뵙다 보니 변화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그 사진 한 장으로 깨달았어요. 마지막으로 직접 뵌 게 벌써 2년 전이라는 것도 그제야 다시 셈해봤어요.
조카들은 또 훌쩍 컸어요. 작년 사진과 비교해보니 키가 한 뼘은 큰 것 같았어요. 이렇게 못 보는 사이 아이들은 계속 자라고 있었어요.
부모님이 계신 방향으로 시간을 계산해봤어요. 지금쯤 저녁 준비가 한창이겠다 싶었어요. 시간대가 다르다는 게 그날따라 더 크게 느껴졌어요.
사진 밑에 달린 댓글도 하나씩 읽어봤어요. "언제 오냐"는 말이 여러 번 반복돼 있었어요. 답을 뭐라고 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어요.
결국 이모티콘 하나로 짧게 답을 남겼어요. 긴 설명을 하려니 오히려 더 쓸쓸해질 것 같았어요. 언제 갈지 저조차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라, 뭐라고 적어도 어색할 것 같았어요.
사진들을 다 보고 나서도 한참을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화면을 끄고 나니 방 안이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졌어요.
사진 속에 제가 없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다가왔어요. 매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인데, 이번엔 사진 밖에서 그 자리를 들여다보는 입장이 됐다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어요.
누군가 제 안부를 물었는지 채팅방을 위로 올려 찾아봤어요. 몇 마디 나온 걸 발견하고는 그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놓였어요. 잊히지 않았다는 확인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별거 아닌 한 줄인데 그 문장을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어요.
영상통화 5분이 그날 전부였다
저녁이 되어 영상통화를 걸었어요. 화면 너머로 시끌벅적한 거실 풍경이 보였어요. 상 치우는 소리, 아이들 뛰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어요.
부모님이 번갈아 화면을 잡고 안부를 물으셨어요. 밥은 잘 챙겨 먹냐, 몸은 괜찮냐 같은 늘 똑같은 질문이었어요.
저도 늘 하던 대답을 했어요. 잘 지낸다고, 걱정 안 해도 된다고요. 사실 그날따라 좀 쓸쓸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화면 속으로 상 위 음식이 살짝 보였어요. 전, 잡채, 송편까지. 냄새는 안 나는데도 먹었던 맛이 떠올랐어요. 어릴 때는 그 음식들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렇게 멀리서 보니 그게 얼마나 귀한 자리였는지 새삼 느껴졌어요.
통화는 5분 남짓으로 끝났어요. 다른 친척들도 인사해야 한다며 급하게 넘어갔어요.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날 저에게는 그게 명절의 전부였어요.
전화를 끊기 전 어머니가 잠깐 화면을 오래 보고 계셨어요. 말은 안 하셨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어요. 저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어 보였어요.
통화를 끊고 나서 방 안이 갑자기 더 조용해진 것 같았어요. 방금까지 들리던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라지니 그 정적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어요.
숙소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뿐이었어요. 그냥 평소 먹던 대로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었어요. 명절 음식 흉내라도 내볼까 하다가, 재료도 손도 마땅치 않아 금세 포기했어요.
밥을 먹으면서 휴대폰으로 아까 그 영상통화 녹화 화면을 다시 돌려봤어요. 짧은 5분이었지만 그거라도 다시 보니 마음이 조금은 놓였어요.
통화 중에 아버지가 문득 "명절인데 거기서 뭐라도 챙겨 먹었냐"고 물으셨던 게 계속 마음에 남았어요. 그 짧은 한마디에 걱정이 다 담겨 있는 것 같았어요.
답장으로 대충 잘 챙겨 먹었다고 했지만, 사실 그날 저녁은 평소보다도 더 간단하게 때운 거였어요. 굳이 사실대로 말해서 걱정을 더 얹어드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런 작은 거짓말은 그동안 몇 번이나 반복해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날 밤 늦게까지 잠이 잘 안 왔어요. 명절이 그리운 건지, 그냥 사람이 그리운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다음 명절엔 미리 날짜를 확인해서 마음의 준비라도 하자고, 그 밤에 조용히 다짐했어요. 그리고 다음번엔 짧게라도 이 나라에서 혼자 챙길 만한 작은 저녁 하나쯤은 미리 준비해두자고도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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