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책상이 어수선한 사람이에요
저는 책상이 늘 어수선한 사람이에요. 게다가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일하다 보니, 그 어수선한 책상이 몇 주마다 통째로 바뀌어요. 숙소가 바뀌면 책상도 바뀌니까요. 그래서 책상 정리라는 게 저에게는 남들과 조금 다른 문제였어요. 아무튼 일을 하다 보면 자료며 메모며 이것저것이 책상 위에 쌓여요. 정리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닌데, 며칠만 지나면 다시 그 상태가 돼요. 그런데 책상을 깨끗이 비우면 집중이 잘된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어요. 노트북 하나만 남기고 다 치우라는 조언도 많이 봤고요. 어수선한 책상이 정신까지 어수선하게 만든다는 말도 있었어요. 그런 말들을 들으면 제 책상이 문제인 것 같아서 마음이 좀 불편했어요. 남들은 다 깨끗한 책상에서 집중해서 일하는데 저만 못 하는 건가 싶었죠. 그래서 저도 한번 제대로 치워보기로 했어요. 조언대로 노트북과 물잔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서랍에 넣었어요. 책상이 텅 비니까 처음에는 확실히 보기에 좋더라고요. 뭔가 일을 잘할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요.
치웠더니 오히려 일이 안 됐어요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어요. 깨끗한 책상에서 일하니 오히려 능률이 떨어졌어요. 뭔가를 찾는 데 자꾸 시간이 걸렸어요. 늘 손 닿는 자리에 두던 메모를 서랍에 넣어놨더니, 그걸 확인하려고 매번 서랍을 열어야 했어요. 참고하던 자료도 눈앞에 없으니 자꾸 잊어버렸어요. 예전에는 고개만 돌리면 보이던 것들이 다 사라지니, 그걸 전부 머릿속으로 기억하고 있어야 했어요. 책상은 깨끗한데 머리는 더 복잡해진 거예요. 깨끗한 책상이 정신을 맑게 해준다더니, 저는 반대로 자잘한 걸 기억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에 쓸 집중력이 줄었어요. 며칠 그렇게 해보다가 결국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어요. 치우기 전보다 일이 안 되는데 굳이 깨끗한 책상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때 처음으로 그 조언이 저에게는 안 맞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어수선함이 사실은 지도였어요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 책상의 어수선함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었어요. 남이 보면 그냥 잡동사니 더미인데, 저에게는 물건마다 자리가 있었어요. 왼쪽 앞에는 지금 하는 일의 자료, 오른쪽에는 나중에 볼 것들, 가운데는 오늘 안에 처리할 것. 저는 그걸 눈으로 슬쩍 훑기만 해도 지금 뭘 해야 하는지가 대충 보였어요. 말하자면 그 어수선함이 저에게는 일종의 지도였어요. 물건이 놓인 위치 자체가 저에게 정보를 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다 서랍에 넣어 안 보이게 하니, 지도를 통째로 치운 셈이 됐어요. 그러니 길을 헤맬 수밖에 없었어요. 깨끗한 책상은 보기에는 좋지만, 저에게는 아무 표시도 없는 백지 같았어요.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를 매번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려야 하는 백지요. 남에게는 정돈이 도움이 되겠지만, 저에게는 그 어수선함이 이미 정돈이었던 셈이에요.

노마드라서 매번 그 지도를 다시 그려요
그런데 저처럼 자주 옮겨 다니는 사람에게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붙어요. 이 지도가 옮길 때마다 지워진다는 거예요. 새 숙소에 도착하면 책상도, 그 위에 물건을 놓을 공간도 다 달라요. 어떤 곳은 책상이 넓고 어떤 곳은 좁은 탁자 하나가 전부예요. 그래서 옮긴 뒤 처음 며칠은 늘 일이 더뎌요. 아직 그 지도가 그려지기 전이거든요. 뭐가 어디 있는지 손에 익지 않아서 자꾸 두리번거려요. 그러다 며칠 지나면 그 책상에도 제 나름의 배치가 생겨요. 자료는 이쪽, 충전기는 저쪽, 필기구는 여기, 하는 식으로요. 그 배치가 자리를 잡으면 그제야 일이 평소 속도로 돌아와요. 결국 저는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이 지도를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셈이에요. 남들 눈에는 그냥 어질러놓는 걸로 보이겠지만, 저에게는 그게 낯선 공간을 제 작업 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이에요.

그래도 규칙은 하나 있어요
물론 아무렇게나 쌓아두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저에게도 규칙이 하나는 있어요. 지금 하는 일에 관계된 것만 손 닿는 자리에 두고, 나머지는 좀 밀어놔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책상 전체가 깨끗할 필요는 없지만, 팔을 뻗는 반경 안쪽만큼은 지금 이 일의 물건들로 채워요. 그러면 어수선한 와중에도 눈앞은 지금 할 일에 맞춰져 있어요. 일이 바뀌면 그 반경 안의 물건도 바꿔요. 오전에 하던 일과 오후에 하는 일이 다르면, 가까운 자리에 놓이는 것도 달라져요. 그러니까 저는 책상을 비우는 게 아니라 눈앞을 지금 일에 맞추는 쪽이에요. 멀리 밀어둔 잡동사니는 어차피 시야에 흐릿하게만 들어와서 그렇게 방해가 되지 않아요. 정작 신경 쓰이는 건 손 바로 앞에 엉뚱한 게 놓여 있을 때예요. 그것만 지금 일에 맞춰두면 나머지는 좀 어수선해도 괜찮았어요. 그래서 저는 책상을 통째로 정리하는 대신, 일을 시작할 때 손 앞자리만 슬쩍 정리해요. 그거면 마음이 정리되는 효과는 충분히 나더라고요. 온 책상을 다 비우지 않아도요.
깨끗한 책상이 정답은 아니었어요
정리된 책상이 정리된 정신을 만든다는 말이 있죠. 저도 한동안 그 말을 믿어보려 했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잘 안 맞았어요. 저에게 맞았던 건 남 보기에 좀 어수선해도 제 손과 눈이 기억하는 배치였어요. 사람마다 머리가 일하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텅 빈 책상에서 가장 잘 집중하고, 어떤 사람은 저처럼 눈앞에 단서가 좀 널려 있어야 편해요. 그러니 깨끗한 책상 사진을 보면서 제 책상이 잘못됐다고 여길 필요는 없었던 거예요. 그건 그 사람에게 맞는 방식이지 모두에게 맞는 정답은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옮겨 다니는 생활을 하다 보니, 그 어수선한 지도를 매번 새로 그리는 수고는 제 몫으로 남아요. 책상이 손에 익을 때쯤이면 그 지도도 얼추 완성되는데, 그러고 나면 또 얼마 안 가 짐을 싸서 새 책상 앞에 앉게 돼요. 그래도 저는 이제 그 백지가 그렇게 막막하지 않아요. 며칠이면 다시 제 지도가 그려진다는 걸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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