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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셋 & 웰니스 (Mindset & Wellness)

몇 나라를 거쳐왔는지 세어본 밤, 숫자 앞에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by wellnomadness 2026. 9. 24.

여권 갱신을 하러 사진관에 앉아 있다가 문득 궁금해졌어요. 이 여권에 도장이 몇 개나 찍혔을까 하고요.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하나하나 세어봤어요.


여권을 펼치고 도장을 세기 시작했다

여권 갱신 신청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낡은 옛날 여권을 서랍에서 꺼내봤어요. 몇 년 동안 한 번도 다시 펼쳐본 적이 없었어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도장들이 빼곡했어요. 색깔도, 모양도, 언어도 다 제각각이었어요. 어떤 건 선명했고, 어떤 건 흐릿해서 겨우 알아볼 정도였어요.

어떤 페이지는 도장이 겹쳐 찍혀서 어느 게 입국이고 어느 게 출국인지 구분도 안 됐어요. 그런 페이지 앞에서는 한참을 돋보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들여다봤어요.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어봤어요. 입국과 출국 도장을 다 합치니 생각보다 훨씬 많았어요. 중간에 몇 번을 세다가 헷갈려서 다시 처음부터 셌어요.

나라 이름을 하나씩 적어보기도 했어요. 적다 보니 어떤 나라는 이름은 기억나는데 그때 뭘 했는지는 가물가물했어요. 반대로 며칠 안 머문 나라인데도 특정 장면 하나는 또렷하게 남아 있었어요.

종이에 나라 이름을 쭉 적어놓고 보니, 순서가 뒤죽박죽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분명 시간 순서대로 다녔는데도, 기억 속에서는 나라들이 뒤섞여 있었어요. 몇 번은 순서를 바로잡으려고 사진첩 날짜까지 뒤져봐야 했어요.

낡은 여권 페이지에 찍힌 여러 입출국 도장을 손끝으로 짚어보는 모습

숫자를 다 세고 나니 서른이 넘었어요. 그 숫자를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뿌듯함과 아득함이 동시에 몰려왔어요.

숫자를 다시 확인하려고 처음부터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 번을 더 셌어요. 세 번 다 같은 숫자가 나오고 나서야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그 나라들에서 보낸 시간을 다 합치면 몇 년이나 될까 계산해봤어요. 정확한 숫자를 내기는 어려웠지만, 최소한 제 인생의 상당 부분이 그 안에 있다는 건 분명했어요.

문득 그 세월 동안 한국에 머문 날을 다 합치면 며칠이나 될지도 궁금해졌어요. 계산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적은 날들이었어요.

명절마다 잠깐씩 들렀던 날들을 하나하나 더해봤는데, 그마저도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그동안 명절을 몇 번이나 다른 나라에서 혼자 보냈는지 세어보니 그 숫자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 사실을 마주하니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이 생활이, 숫자로 보니 꽤 낯설게 느껴졌어요.

계산기를 붙잡고 몇 번을 다시 셌어요. 혹시 잘못 계산한 건 아닌가 싶어서였는데, 몇 번을 다시 해도 결과는 비슷했어요. 그 며칠이라는 숫자가 자꾸 눈에 밟혔어요.


숫자 앞에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서른 개가 넘는 나라를 거쳐왔다는 게 자랑스러워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런 기분만 들지는 않았어요.

그 시간 동안 놓친 것들도 같이 떠올랐어요. 가족 행사에 못 간 날들, 친구 결혼식을 화면으로만 지켜본 날들이 하나씩 겹쳐졌어요.

여권 속 도장 하나하나가 화려한 경험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그만큼의 부재도 있었다는 걸 그 숫자를 세면서 새삼 느꼈어요.

한 나라에 정착해서 사는 친구들과 저를 비교하게 됐어요. 그들은 뿌리를 내렸고, 저는 계속 옮겨 다니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친구들의 근황을 볼 때마다 집 사진이나 아이들 사진이 올라오는데, 저는 그 자리에 매번 다른 배경의 숙소 사진만 올리고 있었어요. 같은 나이대인데도 삶의 모양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새삼 낯설게 느껴졌어요.

그렇다고 후회가 되는 건 아니었어요. 다만 이 숫자가 주는 무게가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는 걸 그날 처음 실감했어요.

서른 개의 나라 중에 다시 가고 싶은 곳과, 다시는 안 가도 될 것 같은 곳을 나눠보기도 했어요. 신기하게도 힘들었던 곳일수록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었어요.

숫자 하나로 이렇게 많은 생각이 따라올 줄은 몰랐어요. 그냥 궁금해서 세어본 건데, 예상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마음이 흘러갔어요.

그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어요. 지나온 나라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어요.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불을 켜고 다시 여권을 펼쳤어요. 도장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짚으며 그때 기억을 애써 떠올려봤어요. 어떤 페이지는 선명했고, 어떤 페이지는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숫자보다 남은 것들을 세어보기로 했다

며칠 지나고 나서 다시 그 여권을 펼쳐봤어요. 이번엔 도장 개수 말고, 각 나라에서 남은 게 뭔지를 떠올려보기로 했어요.

숫자로는 안 잡히는 것들이 훨씬 많았어요. 어느 나라에서 배운 요리 하나, 어느 도시에서 만난 사람과 지금도 이어지는 인연, 힘든 순간을 넘기고 나서 생긴 단단함 같은 것들이었어요. 그중 몇 개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로 남아 있어서, 그 나라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 얼굴부터 떠올라요.

어느 나라에서는 아플 때 도와준 이웃이 떠올랐고, 또 어느 나라에서는 말이 안 통해서 한참을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 덕분에 위기를 넘긴 기억이 났어요. 이런 장면들은 여권에 도장으로는 절대 남지 않는 것들이었어요.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아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 대신 얻은 것들도 분명히 있었어요. 두 가지를 저울질하기보다는, 그냥 둘 다 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어느 한쪽이 더 옳았다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가족들도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영상 통화로 서로의 근황을 나누는 것에 나름대로 익숙해졌어요. 물리적으로 같이 있지 못해도 이어지는 방식이 조금씩 자리를 잡은 셈이에요.

서른 개의 도장이라는 숫자는 이제 저에게 성취의 지표가 아니라, 그냥 지나온 시간의 기록으로 남았어요.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게 의미가 없어졌어요.

앞으로 몇 개 나라를 더 다니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그 숫자에 다시 얽매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뭘 남기느냐라는 걸, 그 밤에 여권을 세어보다가 깨달았어요.

이제는 새 나라에 도착할 때마다 도장 개수를 늘리는 것보다, 그곳에서 뭘 기억할지를 먼저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 마음가짐 하나가 여행하는 방식 자체를 조금 바꿔놓은 것 같아요.

최근 새로 도착한 나라에서는 도장을 확인하기보다 그 동네 식당 주인 이름부터 먼저 물어봤어요. 예전 같으면 신경도 안 썼을 사소한 것들이 이제는 더 오래 남을 기억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새 여권이 나오면 이 낡은 여권은 서랍 깊숙이 넣어둘 것 같아요. 가끔 다시 꺼내 도장을 세어보는 날이 오겠지만, 그때는 숫자보다 그 안에 담긴 얼굴들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아요. 서른 개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도, 그 숫자 자체보다는 그 안에 쌓인 시간의 결이 더 소중하게 남을 것 같아요. 사진관 의자에 앉아 무심코 떠올렸던 질문 하나가 이렇게 긴 밤의 생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