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60 카드가 다 되는 시대에 현금 오백 달러를 들고 다니는 이유 카드를 내밀었는데 고개를 젓던 순간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내밀었는데 상대가 고개를 젓는 순간이 있어요. 현금만 받는다는 뜻이에요. 요즘 세상에 카드가 안 되는 곳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실제로 다녀보면 생각보다 자주 마주쳐요. 로컬 시장의 좌판, 오래된 동네 식당, 작은 마을의 숙소 같은 곳들이 그래요. 문제는 이런 상황이 대체로 가장 곤란한 타이밍에 온다는 거예요. 짐을 들고 도착한 첫날, 배가 고픈 저녁 시간, 혹은 택시에서 내려야 하는 순간에요. 카드 단말기는 있는데 그날따라 통신이 안 돼서 결제가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가게 주인도 난감해하고 저도 난감한, 누구 잘못도 아닌 상황이 벌어지는 거예요. 저도 몇 번 겪고 나서야 알았어요. 결제 수단을 하나만 믿고 다니면, 그 하나가 안 되는 순간 아무.. 2026. 4. 6.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에 매번 버벅여요: 도시가 두 종류로 나뉘거든요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을 자주 받아요이렇게 지낸다고 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있어요. 그동안 다닌 데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거예요.그런데 저는 이 질문에 매번 버벅여요. 한 곳을 못 고르겠어서요. 몇 초 생각하다가 결국 두세 곳을 말하게 되고, 그러면 상대도 좀 애매한 표정이 돼요.처음에는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 줄 알았어요. 다녀온 곳이 쌓이니까 흐려지는 거라고요.그런데 몇 번 더 받아보고 알았어요. 문제는 제 답이 아니라 질문이 하나였다는 거였어요.질문하시는 분들이 기대하는 답이 어떤 건지도 알아요. 지명 하나와 짧은 이유요. 그게 대화가 이어지기 좋은 형태거든요. 그런데 제 안에서는 그 답이 안 만들어져요.그러다 언제부턴가 그냥 최근에 있었던 곳을 말하게 됐어요. 성의 없는.. 2026. 4. 5. 오사카에서 신발이 젖은 채로 하루를 보냈어요: 날씨가 일정이 된 뒤 오사카에서 첫날 흠뻑 젖었어요몇 년 전 오사카에 갔을 때 일이에요.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행사장에 갔는데 들어서자마자 비가 쏟아졌어요.우산이 없었어요. 예보를 안 본 건 아니에요. 그날 오전은 괜찮다고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몇 시간 만에 바뀌더라고요.신발이 젖은 채로 하루를 보냈어요.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옷은 어느 정도 마르는데 신발은 안 말라요. 오후 내내 발이 축축했고 그날 저녁에는 아무것도 못 했어요.그날 저녁에 우산을 하나 샀어요. 그런데 그 우산이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었어요.그날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 하늘이 흐리긴 했어요. 그런데 그 정도는 늘 있는 일이라 그냥 나왔어요. 돌아보면 흐린 하늘을 보고도 아무 판단을 안 한 게 그날의 시작이었어요.현지에서 우산을 사는 것도 그 자리.. 2026. 4. 5. 택시만 타다 대중교통을 타기 시작한 뒤 낯선 도시에서 저는 택시부터 찾았어요낯선 도시에 내리면 저는 오랫동안 택시나 차량 호출 앱부터 켰어요. 이유는 단순해요. 편하고, 실패할 일이 없으니까요. 목적지를 입력하면 문 앞까지 데려다줘요. 말을 못 해도 되고,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 게 무서웠던 저에게 택시는 가장 안전한 이동 수단이었어요. 창밖으로 도시가 지나가긴 하는데, 그건 유리 안쪽에서 보는 풍경이었어요. 에어컨이 나오는 조용한 상자 안에 앉아 목적지까지 실려 가는 거예요. 편하긴 한데, 여행을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이상한 허전함이 생겼어요. 분명 그 도시에 다녀왔는데 그 도시를 잘 모르겠는 느낌이었어요. 공항에서 숙소로, 숙소에서 약속 장소로 택시로만 오가면 그 사이에 있는 도시는 통째.. 2026. 4. 4. 낯선 주방에서 지키는 공식 하나: 단백질과 채소를 볶는 이십 분 숙소를 고를 때 주방 사진부터 보는 이유숙소를 예약할 때 저는 침대나 전망보다 주방 사진을 먼저 봐요. 인덕션이든 가스레인지든 불이 있는지, 프라이팬이 하나라도 있는지, 칼과 도마가 갖춰져 있는지를 확인해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어요. 여행처럼 며칠 다녀오는 일정이라면 매 끼니 밖에서 사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오히려 그게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 도시에 몇 주씩 머물면서 일까지 해야 하는 생활이 이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외식이 일주일을 넘어가면 몸이 먼저 반응해요. 어느 나라든 밖에서 파는 음식은 간이 세고 기름이 많은 편이라, 열흘쯤 지나면 속이 더부룩하고 아침에 몸이 무거워요. 컨디션이 떨어지면 일이 밀리고, 일이 밀리면 또 대충 때우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돼요. 비용도.. 2026. 4. 4. 공항 검색대에서 가방을 다 꺼낸 날: 짐을 못 줄인 건 기준이 없어서였어요 검색대에서 가방을 전부 꺼냈어요공항 보안 검색에서 제 가방이 걸린 적이 있어요. 화면에 뭐가 잔뜩 엉켜 있으니 열어보자고 하시더라고요.그래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옆에서 가방을 다 비웠어요. 케이블이 계속 나왔어요. 검사하시는 분이 이게 다 뭐냐고 물으셨는데 저도 몇 개는 설명을 못 했어요.그때 좀 창피했어요. 창피했던 게 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제가 뭘 들고 다니는지 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그 자리에서 드러나서였어요.다시 넣는 데 한참 걸렸고 그 뒤로 줄이 밀렸어요. 그날 이후로 가방을 한 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가방을 다시 싸면서 보니 같은 용도의 물건이 두세 개씩 있었어요. 산 걸 잊고 또 산 것들이요. 그것도 그날 처음 알았어요.그 뒤로 검색대에서는 미리 꺼내놓고 지나가요. 어차피 열어보자고 .. 2026. 4. 3. 이전 1 ··· 38 39 40 41 42 43 4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