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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생산성 (Productivity)

호치민 발표 10분 전 정전, 배터리 6퍼센트로 미팅을 끝냈다

by wellnomadness 2026. 10. 4.

발표 시작 10분 전, 호텔 방 전체가 갑자기 깜깜해졌어요. 에어컨도, 조명도, 콘센트에 꽂아둔 노트북 충전기도 한꺼번에 멈췄어요. 호치민의 정전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그 순간 제 노트북 배터리는 34퍼센트였어요. 창밖을 보니 건너편 건물들도 전부 불이 꺼져 있었어요. 이 건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네 전체가 정전된 거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어요.


배터리 34퍼센트로 발표를 시작했다

미팅은 싱가포르 클라이언트와의 분기 보고 발표였어요. 몇 주 동안 준비한 자료였고, 참석자 중에는 의사결정권자도 있었어요. 미룰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어요. 일단 휴대전화 핫스팟으로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노트북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춘 뒤 발표를 시작했어요.

정전이 된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일정을 미뤄야 하나"였어요. 하지만 클라이언트 쪽 참석자 셋 중 둘은 이미 접속해 대기하고 있었고, 새로 일정을 잡으려면 다음 가능한 시간이 2주 뒤였어요. 분기 보고라는 성격상 2주를 미루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어요. 몇 초 고민하다가,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에어컨이 꺼진 방은 금세 더워지기 시작했어요.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도 카메라는 켤 수 없었어요. 배터리를 조금이라도 아끼려면 화면 공유만 하고 제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 쪽이 나았거든요. 목소리만으로 발표를 이어가며, 혹시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어요.

화면 공유를 켜고 첫 슬라이드를 띄우는데, 머릿속에서는 계속 배터리 퍼센트가 떠나지 않았어요. 10분, 20분이 지나면서 숫자가 29, 24, 19로 줄어드는 게 눈에 선했어요. 발표 내용에 집중해야 하는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시계를 보며 '몇 분 남았을까'를 계산하고 있었어요.

중간에 질문이 몇 개 들어왔어요. 평소라면 여유 있게 추가 자료를 띄워 보여줬을 텐데, 그날은 꼭 필요한 화면만 최소한으로 띄우고 말로 설명을 더 보탰어요. 배터리를 아끼려고 선택한 방식이었는데, 오히려 핵심만 짚어 설명하게 돼서 발표가 더 간결해졌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어요.


정전은 끝나지 않고 발표만 끝났다

발표가 끝날 무렵 배터리는 6퍼센트였어요.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에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어요. 혹시라도 화면이 꺼지면 이 중요한 미팅 자체가 중단될 상황이었으니까요. 다행히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화면을 끄는 순간까지 노트북은 버텨줬어요. 화면이 꺼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어요.

노트북을 덮고 나서야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다는 걸 알아챘어요. 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어요. 배터리 숫자가 한 자릿수로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끝까지 침착한 척 말을 이어갔던 그 몇 분이, 지금 돌이켜봐도 가장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정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어요. 호텔 로비에 내려가 보니 직원들이 손전등을 들고 투숙객을 안내하고 있었어요. 전력 회사 쪽 문제로 복구까지 몇 시간은 더 걸릴 거라는 안내를 받았어요. 결국 1층 로비 소파에 앉아 보조배터리로 노트북을 충전하며 남은 업무 메일을 처리했어요.

정전된 호텔 로비에서 노트북 화면 불빛에 의지해 앉아 있는 모습

로비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런 대규모 정전이 호치민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라고 했어요. 우기철 집중호우로 변전소에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 넓은 구역이 한꺼번에 끊기곤 한다는 설명이었어요. 현지에서는 다들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저한테는 그날이 가장 긴장됐던 미팅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어요.

로비에는 저 말고도 비슷한 처지의 투숙객이 여럿 있었어요. 다들 콘센트가 살아있는 몇 안 되는 비상 발전기 구역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각자의 기기를 충전하고 있었어요. 낯선 사람들끼리 "오늘 무슨 일정이었냐"며 짧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렸어요.


그날 이후로 바뀐 노트북 사용 습관

그 일을 겪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건 대용량 보조배터리를 하나 더 사는 거였어요. 기존에 쓰던 작은 보조배터리는 휴대전화 충전 정도만 겨우 감당했는데, 노트북까지 충전할 수 있는 큰 용량 제품으로 바꿨어요. 평소에는 무겁게 느껴지는 짐이지만, 그날 이후로는 이 무게가 전혀 아깝지 않게 됐어요.

새로 산 보조배터리는 노트북을 한 번 완충할 수 있는 용량이라, 이제는 정전이 나도 몇 시간은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서요. 가방 안에서 가장 무거운 물건이 됐지만, 그 무게를 느낄 때마다 오히려 안심이 돼요. 다시는 배터리 숫자를 초조하게 지켜보며 발표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무게를 기꺼이 감수하게 만들었어요.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에는 이제 노트북을 100퍼센트까지 충전해두는 걸 당연한 루틴으로 삼고 있어요. 예전에는 70퍼센트 정도만 돼도 "어차피 콘센트 꽂아두면 되지"라며 넘어갔는데, 이제는 그 여유 30퍼센트가 생사를 가를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화면 밝기도 미리 낮춰두고, 불필요한 프로그램은 전부 종료해둔 채로 미팅에 들어가요.

휴대전화 핫스팟도 마찬가지로 미리 점검해요. 숙소 와이파이가 멀쩡해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데이터 요금제를 넉넉하게 유지하고, 유심이 두 개 들어가는 휴대전화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예요. 중요한 미팅 전날에는 전력 상황이 불안정한 지역인지 미리 검색해보는 습관도 생겼어요. 사소해 보이지만, 그 10분이 가르쳐준 교훈치고는 꽤 오래가는 습관들이에요.


전기가 당연히 들어온다는 전제 자체가, 어떤 나라에서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그날 배웠어요. 중요한 발표일수록 배터리 잔량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 건, 그 10분 전의 정전 덕분이었어요. 지금도 그 발표 자료를 열 때마다 그날의 땀과 긴장이 함께 떠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