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오후에 카드값 명세서를 쭉 훑어보다가 낯선 결제 항목을 발견했어요. 매달 12달러씩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뭔지 기억이 안 났어요.
언제 가입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서비스 이름을 하나하나 검색해보니 2년 전에 한 번 써보려고 가입했던 디자인 툴이었어요. 그 뒤로 한 번도 안 열어봤더라고요.
그 하나가 아니었어요. 명세서를 몇 달치 뒤져보니 비슷한 게 다섯 개가 더 있었어요. 하나를 찾을 때마다 또 하나가 나와서 나중엔 아예 각오하고 훑어봤어요.
클라우드 저장 공간, 화상 회의 툴 유료 버전, 번역 프로그램, 이미지 소스 사이트 두 곳까지요.
전부 무료 체험으로 시작했다가 자동으로 결제로 넘어간 것들이었어요. 그때는 나중에 취소해야지 하고 잊어버린 거예요. 일이 몰리는 시기에 가입한 것들이라 그 뒤로 다시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게 컸어요.
한 달 한 달은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 눈에 잘 안 띄었어요. 그런데 다 더해보니 한 달에 8만 원 가까이 되고 있었어요.
1년으로 계산하면 100만 원 가까운 돈이었어요. 그 사이 저는 그중 절반도 제대로 안 쓰고 있었고요.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가입한 게 쌓인 거였어요. 정리할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거예요.
더 찾아보니 언어가 다른 결제 항목도 몇 개 있었어요. 현지 통화로 찍혀 있어서 뭔지 바로 알아보기도 어려웠어요.
한 항목은 이름만 봐서는 뭔지 짐작도 안 갔어요. 검색을 해보고 나서야 예전에 급하게 필요해서 가입했던 PDF 편집 툴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중 하나는 이미 2년 전에 앱 자체가 서비스를 종료했는데도 결제만 계속되고 있었어요. 그게 제일 황당했어요.
확인해보니 결제만 다른 회사로 넘어가서 계속 청구되고 있었어요. 서비스는 없어졌는데 요금 청구 시스템만 살아 있었던 셈이에요.
환율 때문에 달러로 결제되는 항목은 매달 원화 환산 금액이 조금씩 달랐어요. 그래서 명세서만 봐서는 같은 항목인지 알아채기도 더 어려웠어요.
전부 처음엔 급하게 필요해서, 혹은 무료 체험이 끝나가서 얼떨결에 결제로 넘어간 것들이었어요. 그 순간의 편리함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확인해보겠다고 했어요. 며칠 뒤에 연락이 왔는데, 자기는 저보다 더 심했다고 했어요. 매달 15만 원 가까이 안 쓰는 구독료로 나가고 있었다고요.
저만 이런 게 아니라는 게 이상하게 위안이 됐어요. 동시에 이게 혼자 일하는 사람들에게 흔한 함정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누가 대신 확인해주지 않으니까요.
회사에 다니면 법인카드나 경비 처리 시스템이 이런 걸 어느 정도 걸러줘요. 혼자 일하면 그 역할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걸 이번에 제대로 느꼈어요.
하나씩 취소하는 것도 일이었다
발견했으니 바로 취소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생각보다 번거로웠어요.
어떤 서비스는 웹사이트에서 몇 번 클릭하면 끝났어요. 어떤 서비스는 취소 버튼을 아예 찾기 어렵게 만들어놨어요.
한 곳은 전화로만 해지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콜센터가 미국 시간대라 제 쪽에서는 새벽에 걸어야 했어요.
또 다른 곳은 해외 카드로는 온라인 해지가 안 되고 이메일로 요청해야 한다고 했어요. 답장이 오는 데만 5일이 걸렸어요.
이렇게 여섯 개를 정리하는 데 이틀이 걸렸어요. 매달 조금씩 빠져나가던 돈이 사실은 취소할 때도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던 거예요.
정리하면서 결제 수단도 하나로 몰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카드 두 개, 페이팔 하나에 흩어져 있어서 전체 금액을 한눈에 보기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결제 수단을 카드 하나로 통일했어요. 앞으로는 명세서 한 장만 보면 전체가 보이게요.
그리고 무료 체험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종료일을 캘린더에 적어두기로 했어요. 그 하루만 신경 쓰면 자동 결제로 넘어가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요.

서비스가 종료된 걸 모르고 계속 결제되던 그 항목은 해지 창구를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어요. 이미 없어진 서비스라 안내 페이지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어요.
결국 카드사에 직접 연락해서 해당 가맹점 결제를 차단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서비스 쪽에 연락할 방법이 아예 없었던 거예요.
이 일을 겪고 나서 가입할 때 해지 방법부터 미리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시작하기는 쉬운데 끝내기는 훨씬 어렵다는 걸 그제야 배웠어요.
그리고 결제 내역을 한눈에 보는 스프레드시트를 하나 만들었어요. 서비스 이름, 월 금액, 결제일, 해지 방법을 한 줄씩 적어뒀어요.
해지 방법도 링크를 같이 적어뒀어요. 나중에 취소할 때 그 서비스 이름과 절차를 다시 검색하지 않아도 되게요.
가입할 때 쓴 이메일 주소도 헷갈렸어요. 예전 회사 메일, 개인 메일, 프리랜서용 메일을 섞어 썼더니 어떤 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하는지도 기억이 안 났어요. 그것도 이번에 하나로 정리했어요. 비밀번호 찾기만 대여섯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다 모을 수 있었어요.
처음엔 번거로워서 미루고 싶었는데, 한 번 만들어두니 그다음부터는 새로 가입할 때마다 한 줄만 추가하면 됐어요. 관리하는 데 드는 시간이 오히려 줄었어요.
지금은 분기마다 점검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3개월에 한 번씩 명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는 걸로 정했어요.
캘린더에 미리 알림을 넣어뒀어요. 그날이 되면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그동안의 결제 내역을 쭉 봐요.
한 번은 그렇게 보다가 예전에 취소한 줄 알았던 서비스가 다시 결제되고 있는 걸 발견하기도 했어요. 해지 처리가 제대로 안 됐던 거예요.
이제는 새 툴을 쓸 때도 무료로 되는 만큼만 쓰고, 정말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 때만 결제해요. 예전에는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가입한 게 많았어요.
그리고 쓰고 있는 툴도 6개월에 한 번은 정말 필요한지 다시 물어봐요. 일하는 방식이 바뀌면 필요한 툴도 바뀌더라고요.
가족 요금제처럼 여러 개를 묶어 쓰는 상품도 다시 봤어요. 혼자 쓰는데 4인 요금제를 그대로 쓰고 있던 것도 있었어요. 필요한 만큼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매달 나가는 돈이 줄었어요.
연 단위 결제로 바꿀 수 있는 건 바꿨어요. 매달 나가는 것보다 한 번에 내는 게 할인율이 더 컸던 경우가 몇 개 있었어요.
이렇게 정리하고 나서 매달 나가는 돈이 3만 원대로 줄었어요. 8만 원에서 3만 원이면 1년에 60만 원 가까이 아낀 셈이에요.
그 아낀 돈으로 다음 이동 항공권 하나를 더 여유 있게 끊을 수 있었어요. 눈에 안 보이던 돈이 눈에 보이는 걸로 바뀌니 정리한 보람이 실감 났어요.
그리고 그 돈이 몇 년 동안 조용히 새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씁쓸했어요. 매달 몇천 원, 몇만 원씩이라 눈치채기 어려웠던 거예요. 큰 지출은 신경 쓰면서 작은 지출은 방치하고 있었던 셈이에요.
그 12달러짜리 결제 항목 하나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몰랐을 거예요. 혼자 일하면 누가 지출을 대신 점검해주지 않으니까요. 3개월에 한 번, 30분이면 되는 일인데 그걸 안 해서 몇 년을 그냥 흘려보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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