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로 시안까지 만들어줬는데 연락이 끊겼어요
새로운 클라이언트가 될 뻔한 사람에게 연락이 왔어요. 프로젝트 방향을 보여달라며 간단한 시안을 먼저 만들어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계약도 하기 전이었지만, 이 정도는 성의 표시로 흔한 일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어요.
이틀 동안 시간을 들여 나름 정성껏 시안을 만들었어요. 실제 작업이라면 며칠은 걸릴 만한 분량이었는데,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꽤 공을 들였어요.
시안을 보내고 나서 답장이 왔어요. "좋네요, 검토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라는 짧은 문장이었어요. 그러고는 그대로 연락이 끊겼어요.
며칠을 기다리다 먼저 메시지를 보냈어요. 검토가 어떻게 됐는지 물었는데 답이 없었어요. 일주일 뒤 다시 보냈는데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사람의 SNS를 우연히 봤는데, 제가 만들어준 시안과 비슷한 방향의 결과물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올라와 있었어요. 정확히 같은 건 아니었지만, 방향성이 너무 닮아 있었어요.
확신할 수는 없었어요. 그냥 우연히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씁쓸했어요.
캡처해둔 대화 내용을 다시 읽어봤어요. 계약을 암시하는 말은 여러 번 있었는데, 정작 구체적인 약속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제야 처음부터 애매하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어요.
돌아보니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어요
이 일을 겪고 나서 지난 몇 년을 되짚어봤어요. 정확히 같은 패턴은 아니어도, 비슷하게 무료로 뭔가를 해주고 흐지부지된 적이 몇 번 더 있었어요.
한 번은 짧은 상담을 해줬는데 그 뒤로 연락이 없었고, 한 번은 견적을 위한 초안을 만들어줬는데 역시 소식이 끊겼어요. 그때는 그냥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하고 넘겼어요.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건들을 다시 떠올려보니, 어쩌면 처음부터 계약할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도 섞여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동안 이걸 그냥 '운이 안 좋았다'로 정리하고 있었어요. 제가 준 시간과 결과물에 대한 값을 전혀 따져보지 않았던 거예요.
동료 프리랜서 몇 명에게 이 얘기를 털어놨더니, 다들 비슷한 경험이 최소 한 번씩은 있었어요. 이 바닥에서 꽤 흔한 일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누군가는 아예 무료 시안만 모아서 포트폴리오를 채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도 해줬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이번 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더 짙어졌어요.
무료로 해주는 범위를 정했어요
그 뒤로 계약 전 무료로 해줄 수 있는 범위를 명확히 정했어요. 짧은 상담이나 간단한 방향 제안 정도까지만이고, 실제 작업물처럼 보이는 시안은 절대 무료로 만들지 않기로 했어요.
시안이 꼭 필요한 상황이면 소액이라도 착수금을 먼저 받아요. 그 금액이 크지 않아도, 돈이 오가는 순간 상대의 진지함이 다르게 느껴졌어요.
처음 이 기준을 세웠을 때는 이러다 일을 다 놓치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됐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오히려 진짜 계약할 생각이 있는 사람만 남았어요.

착수금을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연락이 끊기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료로 몇 시간을 쓴 뒤에 사라지는 것보다, 착수금 얘기 나오자마자 사라지는 게 저한테는 훨씬 덜 아까웠어요.
처음 몇 번은 이 기준 때문에 일을 놓쳤다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그런데 몇 달 지나고 보니 그렇게 놓친 건들 중에 실제로 진행됐을 만한 건은 거의 없었겠다는 계산이 나왔어요.
계약서 없이는 시작하지 않아요
시안뿐 아니라 실제 작업 자체도 계약서 없이는 시작하지 않는 원칙을 세웠어요. 간단한 한 장짜리 양식이라도 서명을 받고 나서야 첫 삽을 떠요.
예전엔 급하다는 클라이언트 말에 계약서를 나중으로 미루고 먼저 작업부터 시작한 적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더 위험한 습관이었어요.
계약서 작성을 요청했을 때 불편해하는 클라이언트가 있다면, 오히려 그 반응 자체가 저한테는 신호예요. 정상적인 거래라면 이 정도 절차를 꺼릴 이유가 없으니까요.
한 번은 계약서를 보내자마자 바로 서명해서 돌려준 클라이언트가 있었어요. 그 빠른 반응 하나만으로도 이번엔 제대로 된 거래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실제로 지금까지 좋은 관계로 이어지고 있어요.
결과물에는 표시를 남겨둬요
시안을 보낼 때도 이제는 워터마크나 저해상도 처리를 해서 보내요. 방향성만 확인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니까,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없게 만드는 거예요.
파일 속성에 제작자 정보도 남겨둬요.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최소한의 증빙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걸 이번에 배웠어요.
이런 절차들이 번거롭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 며칠간의 무료 노동과 배신감을 다시 겪는 것보다는, 이 정도 번거로움이 훨씬 나았어요.
시안 파일명에도 날짜와 제 이름을 넣어 저장해요. 별거 아닌 습관 같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 무엇을 보냈는지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지금은 시간의 값을 먼저 따져요
그 잠적 사건 이후로 제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보다, 제 시간의 값을 지키는 게 먼저라는 걸 배웠어요.
누군가를 믿는 것과 제 노동을 공짜로 내주는 건 다른 문제였어요.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던 몇 년이 지금 와서 보니 꽤 아까운 시간이었어요.
지금도 가끔 그 SNS 게시물이 떠오르지만, 예전만큼 속상하지는 않아요. 그 일 덕분에 지금의 기준들이 생겼으니, 완전히 손해만 본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날 이후로 만든 계약서 양식과 워터마크 습관은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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