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을 자주 받아요
이렇게 지낸다고 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있어요. 그동안 다닌 데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 질문에 매번 버벅여요. 한 곳을 못 고르겠어서요. 몇 초 생각하다가 결국 두세 곳을 말하게 되고, 그러면 상대도 좀 애매한 표정이 돼요.
처음에는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 줄 알았어요. 다녀온 곳이 쌓이니까 흐려지는 거라고요.
그런데 몇 번 더 받아보고 알았어요. 문제는 제 답이 아니라 질문이 하나였다는 거였어요.
질문하시는 분들이 기대하는 답이 어떤 건지도 알아요. 지명 하나와 짧은 이유요. 그게 대화가 이어지기 좋은 형태거든요. 그런데 제 안에서는 그 답이 안 만들어져요.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냥 최근에 있었던 곳을 말하게 됐어요. 성의 없는 답인 걸 알면서도요. 제대로 답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그 자리가 대개 그럴 자리가 아니에요.
답이 두 개로 갈려요
제 안에서 도시가 두 종류로 나뉘어 있더라고요. 여행으로 좋았던 곳과 지내기 좋았던 곳이요.
이 둘이 잘 안 겹쳐요. 며칠 있으면서 감탄했던 곳이 한 달 지내보면 불편하고, 처음에 별로였던 곳이 오래 있으니 편해지는 식이에요.
여행으로 좋은 곳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게 많아요. 볼 게 있고 다를수록 좋아요. 짧게 있다 가니까 불편한 건 겪을 시간이 없어요.
지내기 좋은 곳은 반대예요. 특별한 게 없어도 돼요. 대신 매일 반복해도 안 지치는 조건이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어디가 좋았냐는 질문에는 어느 쪽으로 좋았냐는 게 빠져 있는 거예요. 저는 그걸 몰라서 몇 년을 버벅였어요.
이걸 알고 나서 여행 계획을 세우는 방식도 달라졌어요. 짧게 다녀올 곳과 오래 머물 곳을 아예 다른 목록으로 나눠 적어요. 예전에는 가보고 싶은 곳을 한 줄로 쭉 적어뒀는데 그게 도움이 안 됐어요.
그리고 짧게 좋았던 곳을 오래 머물 곳으로 고르는 실수를 몇 번 했어요. 며칠 있어보고 여기 참 좋다 싶어서 다음에 길게 잡았는데, 2주쯤 지나니 처음에 안 보이던 것들이 다 보이더라고요.
지내기 좋은 곳의 조건은 시시해요
지내기 좋았던 곳들을 놓고 공통점을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하나같이 시시한 것들이었어요.
인터넷이 안정적일 것. 이게 첫 번째예요.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화상 회의가 끊기면 그 도시는 저에게 안 맞아요.
장 볼 데가 걸어서 갈 거리에 있을 것. 매일 하는 일이라 이게 멀면 그 도시가 계속 불편해요. 반대로 이게 가까우면 다른 게 좀 부족해도 견딜 만해요.
그리고 조용한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있는지요. 밤새 시끄러운 동네에서 몇 주 지내본 뒤로 이건 꼭 확인해요.
이 목록을 처음 적어놓고 좀 허탈했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제가 따지는 게 결국 인터넷과 장보기라니 싶어서요. 그런데 몇 년 지나 보니 이게 맞더라고요.
약국이나 병원이 가까운지도 이제 봐요. 쓸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닌데, 필요할 때 멀면 그날 하루가 통째로 날아가요. 몇 번 겪고 나서 목록에 넣었어요.
짐을 맡길 데가 있는지도 조건이에요. 오래 머물다 잠깐 다른 데를 다녀올 때 짐을 다 들고 다닐 수는 없거든요. 이건 정말 사소해 보이는데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차이가 커요.

좋았던 게 도시였는지 그때의 저였는지
그리고 하나 더 걸리는 게 있어요. 어떤 도시가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때 제 상황이 같이 붙어 있어요.
일이 잘 풀리던 시기에 있던 도시는 다 좋게 기억돼요. 반대로 돈 걱정이 심하던 때에 있던 곳은 아무리 좋은 데였어도 그 기억이 흐릿해요.
한 곳은 다녀오고 몇 년 동안 좋게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니 특별할 게 없는 동네였어요. 그때 제가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던 시기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요즘은 어디가 좋았다고 말할 때 조심스러워요. 그 도시를 추천하는 건지 제 그때 기분을 말하는 건지 저도 확실하지 않거든요.
반대로 안 좋게 기억되는 도시도 마찬가지예요. 몇 곳은 지금 생각하면 그 도시 잘못이 아니었어요. 제가 그때 몸이 안 좋았거나 일이 꼬여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누가 어떤 도시를 나쁘게 말하는 걸 들으면 언제 갔었는지를 물어봐요. 계절이나 그때 사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다시 가면 다를 수 있어요
실제로 좋았던 곳에 다시 가본 적이 몇 번 있어요. 결과는 갈렸어요.
어떤 곳은 처음만 못했어요. 그 사이에 그곳도 바뀌었고 저도 바뀌었으니까요. 자주 가던 가게가 없어져 있으면 그것만으로 그 도시가 달라져요.
반대로 처음보다 나았던 곳도 있어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아니까 헤매는 시간이 없어요.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바로 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갈 때는 기대를 처음과 다르게 잡아요. 그때 그 느낌을 다시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아는 도시에서 편하게 지내러 가는 거라고요.
그리고 다시 갔을 때 제일 이상한 건 제가 기억하는 그 도시가 없다는 거예요. 장소는 그대로인데 그때의 공기가 없어요. 그건 도시가 아니라 그 시절에 붙어 있던 거니까요.
그래도 다시 가고 싶은 곳은 있어요
이렇게 말해놓고도 다시 가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몇 군데가 떠올라요.
프라하가 그중 하나예요. 그런데 이유가 풍경은 아니에요. 그 도시에서 제가 일이 제일 잘됐거든요. 아침에 나가서 자리에 앉으면 진도가 나갔어요.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설명을 못 하겠어요.
또 하나는 비 오는 날이 많았던 어느 도시예요. 밖에 못 나가니까 일이 밀리지 않았어요. 날씨가 나빠서 좋았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는데 저에게는 그랬어요.
공통점을 보면 둘 다 경치나 음식이 아니에요. 그 도시에서 제가 어떤 상태였는지예요. 결국 제가 기억하는 건 도시의 모습이 아니라 거기서의 제 컨디션이더라고요.
한 가지 더 있어요. 사람이 좋았던 도시요. 몇 달 지내면서 알게 된 분들이 있으면 그 도시가 통째로 다르게 기억돼요. 그런데 그분들이 떠나고 나면 다시 가도 예전 같지 않고요.
이 두 곳을 떠올리다 보면 결국 순위라는 게 성립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준이 매번 다른데 하나로 줄을 세울 수가 없잖아요.
순위를 못 매기겠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에 순위로 답하지 않아요.
대신 되물어요. 며칠 가실 건지, 거기서 일도 하실 건지요. 그 답에 따라 제가 권하는 곳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짧게 보러 가는 분과 한 달 지내러 가는 분에게 같은 곳을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제가 좋았던 곳이 그분에게도 좋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도 덧붙여요. 저는 조용한 걸 좋아하는데 그게 누구에게나 장점은 아니잖아요.
물어보는 분이 짧게 다녀올 계획이면 저는 오히려 답하기가 쉬워요. 볼거리 많은 곳을 말씀드리면 되니까요. 어려운 건 일하면서 지낼 곳을 물으실 때예요. 그때는 그분이 매일 뭘 하는지를 모르면 답이 안 나와요.
혹시 다음에 오래 머물 곳을 고르고 계신다면, 유명한 곳 목록보다 본인이 매일 뭘 하는지를 먼저 적어보시면 좋겠어요. 그 목록에 맞는 도시가 지내기 좋은 곳이에요. 저는 그걸 몰라서 남들이 좋다는 곳을 따라다니다 몇 번 헛걸음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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