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늘 시끄러웠어요
낯선 나라에서 혼자 지내다 보면, 아침이 이상하게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워요. 주변은 조용한데 머릿속은 그렇지가 않아요. 눈을 뜨면 어제 답장이 안 온 메일, 다음 달 방값, 미뤄둔 결정 같은 것들이 벌써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같은 걱정 몇 개가 머릿속을 뱅뱅 돌아요. 문제는 이걸 털어놓을 사람이 곁에 없다는 거예요. 가족이나 동료가 옆에 있으면 아침 먹으면서 "이거 어쩌지" 하고 한마디라도 뱉을 텐데, 저는 숙소를 자주 옮겨 다니며 지내니 그럴 상대가 없어요. 그러니 걱정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안에서만 맴돌아요. 말이 되지 못한 생각들이 그대로 쌓여서, 오전 내내 일에 집중이 안 됐어요. 화면을 보고 있어도 정신은 딴 데 가 있고,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다시 읽었어요. 몸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머리는 온종일 어수선한 방 같았어요.
자기계발서 얘기 같아서 안 믿었어요
'모닝 페이지'라는 걸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시큰둥했어요. 아침에 눈뜨자마자 노트 몇 장을 손으로 아무거나 채워 쓰라는 건데, 그런 자기계발 얘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또 그런 거겠거니 했어요. 아침에 뭘 하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식의 조언은 늘 그럴듯하고, 저한테는 늘 며칠 못 가 흐지부지됐거든요. 게다가 매일 아침 노트 세 장이라니, 안 그래도 시간에 쫓기는 아침에 그런 여유가 어디 있나 싶기도 했어요. 그래서 한참을 안 믿고 넘겼어요. 그러다 유독 머리가 복잡하던 시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한번 해봤어요. 특별한 노트도 아니고 숙소 서랍에 굴러다니던 메모지에, 자고 일어나 아무 말이나 적어 내려갔어요. 잘 쓰려는 게 아니라 그냥 머릿속에 있는 걸 밖으로 꺼내 놓는다는 기분으로요. 기대는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오전이 평소보다 덜 어수선했어요. 뭐가 해결된 것도 아닌데 머릿속이 한 칸쯤 비워진 느낌이었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아무렇게나 쓰는 게 핵심이었어요
해보고 나서 안 건데, 이건 잘 쓰면 안 되는 거였어요. 맞춤법도, 앞뒤 논리도, 남한테 보여줄 만한 주제도 다 필요 없어요. 그냥 떠오르는 걸 순서 없이 쏟아내면 돼요. 어떤 날은 "오늘 진짜 하기 싫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만 몇 줄씩 반복해서 적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손을 멈추지 않는 거지, 그럴듯한 문장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손으로 쓴다는 것도 처음엔 어색했어요. 저는 몇 년째 거의 모든 걸 자판으로 치는 사람이라, 펜을 오래 쥐고 있으면 손이 금방 뻐근해졌어요. 글씨도 제 글씨가 아닌 것처럼 삐뚤빼뚤했고요. 그런데 그 느릿한 감각이 오히려 좋았어요. 자판은 생각보다 빠른데, 손글씨는 생각을 겨우 따라가는 속도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어요. 무엇보다 이건 아무도 안 봐요. 누가 볼 글이 아니니까 검열할 필요가 없어요. 남 눈치 볼 것 없이, 부끄러운 마음이든 치사한 생각이든 그냥 다 적어요. 다 쓰고 나면 다시 읽지도 않고 그냥 덮어버려요. 어디에 남기려고 쓰는 게 아니라, 버리려고 쓰는 거에 가까웠어요.

머릿속에 있을 때와 종이에 있을 때
이걸 얼마간 해보고 제일 달라진 건, 아침마다 저를 괴롭히던 그 걱정 몇 개가 예전만큼 시끄럽지 않다는 거예요. 이유를 가만히 따져봤는데, 걱정이 머릿속에 있을 때랑 종이에 적혀 있을 때가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머릿속에 있는 걱정은 실제보다 훨씬 크고 흐릿해요. 형체가 없으니까 자꾸 부풀고, 부푸니까 계속 맴돌아요. 그런데 그걸 종이에 한 줄로 적어 놓으면, 막상 별거 아닌 경우가 많아요. 한번은 답장 없는 클라이언트 때문에 며칠을 끙끙 앓다가, 그 걱정을 종이에 옮겨 봤어요. 적고 보니 결국 "이틀만 더 기다려 보고, 그래도 안 오면 다시 메일 쓰자"가 전부였어요. 머릿속에서는 온갖 최악의 경우로 몸집을 불리던 게, 막상 글로 옮기니 한 문장으로 끝나더라고요. 눈에 보이는 걱정은 손에 잡히는 크기라, 머릿속에서 굴러다닐 때보다 다루기가 한결 쉬웠어요. 무슨 뾰족한 답이 나온 건 아니에요. 그냥 머릿속이 조금 조용해졌을 뿐이에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 조용함이 필요했어요. 시끄러운 머리로는 어차피 아무 결정도 제대로 못 내렸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저는 걱정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뭔가 대비가 되는 줄 알았는데, 실은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며 밟고 있었을 뿐이었어요. 종이에 옮기고 나서야 그 자리에서 겨우 한 걸음 벗어났어요.
쓸모없어도 되는 유일한 자리
물론 매일 하는 건 아니에요. 어떤 아침은 그냥 건너뛰고, 어떤 날은 반쯤 졸면서 세 줄 적다 마는 날도 있어요. 이걸 한다고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쏟아지거나 일이 술술 풀리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눈에 띄는 변화를 기대하면 아마 실망할 거예요. 다만 제가 이걸 오래 붙잡고 있는 이유는 좀 다른 데 있어요. 제 하루는 대부분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간이에요. 일은 당연히 그렇고, 운동이든 잠이든 따지고 보면 내일 더 잘 일하려고 하는 거예요. 뭘 하든 어딘가에 쓸모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아침에 아무 말이나 적는 이 시간만큼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아요. 누가 읽지도 않고, 어디에 쓰이지도 않아요. 그냥 머릿속에 고인 걸 종이에 흘려보내고 덮으면 끝이에요. 온종일 제 쓸모를 증명하며 사는 저에게, 쓸모없어도 되는 자리가 하루에 하나쯤 있다는 게 조용한 위안이 돼요. 낯선 도시에서 혼자 맞는 아침에, 아무한테도 안 보여줄 몇 장을 적는 그 시간이 저에게는 그런 자리예요. 머리를 비우려고 시작한 일인데, 지나고 보니 저를 잠깐 내버려 두는 시간이기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