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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라이프 (Nomad Life)

넉 달을 살고 떠나는 날에야 그 골목 소리를 들었어요

by wellnomadness 2026. 5. 18.

몇 달 살았는데 그 동네 소리를 몰랐어요

한 도시에서 넉 달을 지내고 떠나던 날이었어요. 짐을 다 싣고 마지막으로 그 골목을 걸어 나왔어요.

그때 처음으로 그 길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어요. 어느 집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멀리서 새가 울었어요.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도 들렸고요.

넉 달 동안 하루에 두 번씩 지나던 길이에요. 그런데 그 소리를 그날 처음 들었어요.

그동안 저는 늘 귀에 뭔가를 끼고 있었거든요.

그 골목이 조용한 편이라 원래도 들을 게 많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더 이상했어요. 그 적은 소리마저 넉 달 동안 한 번도 안 들었다는 거잖아요.

떠나는 날이라 마음이 좀 느슨했던 것도 있어요. 일이 다 끝났으니 급할 게 없었고요. 평소에는 그 길을 늘 뭔가에 늦은 사람처럼 걸었어요.


먹먹한 느낌이 먼저 왔어요

그 무렵에 몸에서 먼저 신호가 왔어요. 저녁이 되면 귀 쪽이 좀 먹먹했어요.

아프지는 않았어요. 그냥 뭔가 눌려 있다가 풀리는 느낌이었어요. 빼고 조금 지나면 없어져서 별거 아니라고 넘겼어요.

그런데 그게 자주 오면서 좀 신경이 쓰였어요. 하루에 몇 시간이나 끼고 있나 세어보니 생각보다 길었어요. 일할 때 끼고, 이동할 때 끼고, 회의할 때 끼니까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이 넘었어요.

이게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저도 몰라요. 다만 그런 느낌이 오면 그날은 빼두는 쪽으로 정했어요. 그리고 계속 그러면 확인을 받아보는 게 맞겠죠.

비행이 잦은 것도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기압이 바뀌는 걸 자주 겪으니까요. 다만 이게 그것 때문인지 끼고 있어서인지는 제가 알 수가 없어요.

볼륨을 크게 쓰던 시절도 있었어요. 주변이 시끄러우면 더 키우게 되잖아요. 지금은 낮게 쓰는데, 이건 확실히 저녁에 덜 뻐근해요.


그런데 몸보다 다른 게 걸렸어요

며칠 빼고 다니면서 이상한 걸 알아차렸어요.

그 동네가 다르게 느껴졌어요. 매일 다니던 길인데 처음 온 것 같았어요. 어디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어느 가게가 문을 여는지 같은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어요.

소리를 막고 있으면 눈도 덜 보게 되나 봐요. 저는 그냥 걸어가는 사람이었지 그 거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좀 아까웠어요. 그 도시에 있으려고 돈과 시간을 썼는데 정작 그 도시를 안 겪고 지낸 셈이잖아요.

숙소와 카페와 화면만 오갔다면 어디에 있든 같았을 거예요. 실제로 몇몇 도시는 지금 떠올려도 기억이 흐릿해요.

소리를 열어두니 방향 감각도 나아졌어요. 차가 어느 쪽에서 오는지, 뒤에 사람이 있는지가 그냥 알아져요. 낯선 도시에서 걸을 때 이게 생각보다 중요하더라고요.

몇 번은 위험할 뻔한 적도 있었어요. 자전거가 뒤에서 오는 걸 못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뒤로는 밖에서 양쪽을 다 막지 않아요.

사진을 봐도 그래요. 그 도시에서 찍은 사진을 나중에 보면 어디였는지는 아는데 그날이 어땠는지가 안 떠올라요. 소리가 없으면 기억이 잘 안 붙는 것 같아요.

늦은 오후 조용한 주택가 골목길


왜 계속 끼고 있었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왜 안 뺐을까를 며칠 생각해 봤어요.

집중하려고 시작한 건 맞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집중과 상관없는 시간에도 끼고 있었어요. 걸어갈 때, 장 볼 때, 줄 서서 기다릴 때요.

돌아보면 그건 집중이 아니라 차단이었어요. 낯선 곳에서 낯선 말이 오가는 게 부담스러우니까 아예 닫아둔 거예요. 그러면 밖에 있어도 제 방에 있는 것처럼 되거든요.

처음 이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모든 게 낯선 상태에서 하나라도 익숙한 걸 붙잡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도 그 습관만 남아 있었어요. 이제는 낯설지 않은데도요.

그리고 낯선 말이 계속 들리는 게 피곤한 것도 사실이에요.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계속 들리면 그것대로 신경이 쓰여요. 그래서 처음에는 막는 게 답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끼고 있으면 누가 말을 걸어도 못 알아들을 핑계가 생겨요. 몰라서 못 들은 게 아니라 안 들리게 해둔 거였는데, 저는 그걸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기고 있었어요.


지금은 나눠서 써요

그 뒤로 규칙을 하나 만들었어요. 일할 때는 쓰고 이동할 때는 안 써요.

앉아서 화면을 보는 시간에는 필요해요. 그건 인정해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면 빼요. 걸어갈 때, 장 볼 때, 밥 먹을 때는 안 껴요.

이렇게 나누고 나서 하루에 끼는 시간이 절반쯤으로 줄었어요. 저녁에 먹먹한 것도 확실히 덜해졌고요.

그리고 이동하는 시간이 다르게 쓰이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그냥 지나가는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그 도시를 겪는 시간이 됐어요. 새 도시에 도착하고 며칠은 특히 그래요.

한 가지 덧붙이면, 이건 조용한 걸 좋아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저는 여전히 시끄러운 걸 못 견뎌요. 다만 언제 막을지를 제가 정한다는 게 달라진 거예요.

카페에서 일할 때도 나눠요. 앉아 있는 동안에는 쓰고, 화장실에 가거나 주문하러 갈 때는 빼요. 짧은 시간인데 그때 들리는 소리가 그 가게의 분위기를 알려줘요.

다만 회의가 많은 날은 예외예요. 그런 날은 하루 종일 끼고 있게 되는데 그건 어쩔 수가 없어요. 대신 그날 저녁에는 아무것도 안 듣고 지내요.


사람 소리도 놓치고 있었어요

빼고 다니면서 예상 못 한 것도 생겼어요.

가게에서 말을 거는 걸 듣게 됐어요. 예전에는 못 듣고 지나간 적이 여러 번이었을 거예요. 상대는 인사를 했는데 저는 반응이 없었던 셈이니까요.

돌아보면 그게 제가 그 도시에서 아무하고도 안 엮인 이유 중 하나였을 것 같아요.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 어려우니까요.

지금은 자주 가는 곳에서는 아예 안 껴요. 몇 마디 나눌 여지를 남겨두는 거예요. 그러다 몇 주 지나면 얼굴을 알아보시고요.

별것 아닌 변화인데 그 도시에서 지내는 느낌이 꽤 달라졌어요.

길을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어요. 예전에는 그런 일이 아예 없었는데 요즘은 가끔 있어요. 아마 예전에도 물어보려던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못 들었던 거겠죠.

이웃과 마주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인사를 하려면 상대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잖아요. 귀를 막고 있으면 그 준비가 애초에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지운 만큼 안 겪은 거였어요

정리하면 제가 놓친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소리를 지우는 건 편해요. 그런데 지운 소리만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 자리에 있던 시간도 같이 흐려져요.

저는 여러 도시를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그중 몇 곳은 사실 겪은 게 아니라 지나간 거였어요. 그 차이를 그 골목에서 마지막 날에 알았어요.

지금은 도시를 옮길 때마다 처음 며칠은 아무것도 안 껴요. 그 며칠에 그 동네가 어떤 곳인지가 대충 들어와요. 나중에 그 도시를 떠올릴 때 남는 건 대개 그 며칠이더라고요.

그리고 이 며칠이 그 도시를 좋아하게 될지 아닐지를 정하는 것 같기도 해요. 처음에 아무것도 안 느끼고 지나가면 나중에 정을 붙이기가 어렵더라고요.

혹시 하루 대부분을 귀에 뭔가를 끼고 지내신다면, 이동하는 시간만이라도 한번 빼보시길 권해요. 저는 넉 달을 살고 떠나는 날에야 그 길의 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그게 좀 아까웠어요.